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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문학

이숙진의 수필 '유자'

by 고흥을 찾아서 2015. 7. 1.

 

유자

                                                                                    이숙진

 

    탱글탱글 상큼하다. 한쪽으로 치우친 공 모양 같다. 초겨울 언저리쯤 되면 노랗게 물들어 빛깔도 곱다.

 

   노란빛 곱기로는 봄의 전령사 개나리와 앙증맞은 애기똥풀이 있고 제주에서 넘실대는 유채바다와 가을 산기슭에서 하롱대는 산국화가 있지만, 짧아진 햇살에  매달린  유자의 유혹은 곱다 못해 수많은 눈동자에 잔물진다. 

 

   곱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타민 C는 레몬의 세 배이며 사과의 25배라 한다. 특히 칼슘은 어느 과일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유익한 과일이다. 동의보감에는 몸이 가벼워지고 수명이 길어진다고도 했다. 모공을 수축시키고 피부를 매끄럽게 해 주어 피부미용재로도 쓰이고, 가래를 삭이고 기침을 그치게 하는 데도 좋다고 한다. 게다가 서늘한 성질 때문에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준다니, 늘 이런저런 결핍에 시달려 가슴 답답한 나로서는 칙사 대접을 해도 과함이 없다.

 

   칙사라고 하면 우선 초나라에 칙사로 간 제나라 재상 ‘안영’이 생각난다.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고사가 전해 내려 올 만큼 명쾌한 답변 때문이다. “회수 남쪽의 귤나무를 회수 북쪽에 옮겨 심으면 다 탱자가 돼 버립니다.” 즉 환경에 따라 사물의 성질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 격의 답으로 초나라 영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이 이야기의 소재(素材)가 바로 이 유자과다. 

 

   해마다 유자가 눈에 띄면 가붓하게 사 날라서 차를 담갔는데, 올해는 인터넷으로 늠연히 한 상자를 주문했다. 유자는 사시사철 판매하는 것이 아니므로 마침 때를 잘 맞추어서 저렴하게 구입하니 흐무뭇하다.

  

 온 집안이 유자향이 퍼져서 기분이 좋아진다. 모양새도 끌밋하다. 못생겨야 상품(上品) 대접을 받는다던 말이 얼마나 헛말인지 깨단함이 너울진다. ‘사과 같은 내 얼굴’이라는 노래는 있지만 유자 같은 내 얼굴이란 노래가 없는 게 서운할 지경이다.

 

   아들아이가 허브 프로방스 마을에 잘못 온 줄 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내릴 뻔 했다며 ‘억삼이’ 흉내를 낸다. 일전에 말이 억 개면 세 개가 진실이고 모두가 뻥이라는 억삼이 이야기로 한 바탕 웃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과일용 세제와 밀가루와 식초에 차례대로 세 번 목욕을 시켰다. 갓 부화된 병아리처럼 맑고 뽀송하다. 수분이 걷힌 유자를 사등분으로 자른 뒤 껍질과 속살을 분류하여 속살은 씨를 뺀다. 씨는 청주를 부어서 육 개월쯤 보관하면 양질의 화장수가 된다고 하여 따라쟁이가 된다.

 

   유자차를 담글 생각을 한 것이 느꺼워 채를 써는 손길이 걸싸다. 큰 함지박에 채 썬 껍질과 돔방돔방 썬 속살을 넣고 설탕으로 비빈다. 첫 맛은 달보드레하나 끝 맛은 씁쓸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껍질은 향이 진하고 담숙하며 속살은 신맛이 난다. 아직 깊은 맛이 없다. 발효되지 않은 탓이다. 사람도 듬쑥해 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듯 씁쓸한 맛이 가시려면 시간이 필요하리라.

 

   유자차가 제 맛을 낼 때면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 벌써부터 나눠 줄 곰살가운 친구 생각이 하나 둘 달팽이 뿔처럼 고개를 든다. 이런저런 부담 없이 나눌 능력이 생기니 이 얼마나 행복한가.

 

   친구를 초대한다고 생각하니 떡도 만들고 싶어졌다. 냉동실에서 오래 잠자고 있는 쌀가루를 채로 곱게 치고 유자와 고구마를 켜켜이 얹어서 시루에 쪘다. ‘세상에 이런 일이 …’

 

   노란 유자와 보라색 고구마가 층을 이룬 것을 자르니, 한 폭의 그랜드 케넌이 탄생한다. 떡에 유자향이 담뿍 배어 냄새만으로도 구쁘다. 여태 먹어 본 떡 중에서 맛과 향과 모양과 색깔 모두가 으뜸이다.

 

   자신감이 생겨서 동인 출판기념회에 유자 시루떡을 해 갔더니 인사와 박수를 분에 넘치게 받았다. 너울가지가 별로인 내가 떡을 해 간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나도 이제 조금씩 발효 하는 중일까. 유자로 인해 이 겨울이 한없이 넉넉하다. 아니, 이 겨울과 봄이 몸을 섞을 때까지 풍성 할 것이다.

 

   친구는 집에서 유자차를 담그면 맛이 없고 시간이 지나면 곰팡이가 나서 버리게 되더라고 한다. 그것은 담는 방법이 틀려서다. 유자 한 켜, 설탕 한 켜 이렇게 하면 설탕이 제대로 배지 않아서 곰팡이가 난다. 함지박에 비벼서 하루 이틀 고루 섞이게 한 다음 저장해야 잘 익는다. 나도 여러 번 실패를 겪었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고, 유자로 유명한 고흥 글벗에게 배운 덕이다.

 

   유자 껍질을 조금 말려서 책상 옆에 두었더니, 솔밭이 아닌데도 피톤치드의 맑은 향이 온 몸을 감싸는 듯 청량하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유자를 닮을 수만 있다면 꽤 솔깃한 인생이겠다. (*)

 

 

 

이숙진  프로필 

경북 안동 풍산 하리 일성당 출생

본명 : 이용훈(李蓉薰)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

순수 문학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동작지부 운영이사

동작 예술 문화단체 총연합회 이사

금목문학 운영이사

문학비평 사여울 동인

예띠 시낭송회 회원

글마루 동인

헤르만 헤세 문학상 수상

저서 : 수필집(가난한 날의 초상(肖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