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내리기
박신아
두 해전 시월 중순 회사에 출근하니 남편의 테이블 옆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높이가 삼십센티가 채 되지 않은 가느다란 가지에 누런 잎파리을 달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도 부실해 보였다. 잎파리의 모양으로는 레몬나무나 오랜지나무일거라 생각 되었다. 남편도 누가 갖다 두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점심 때가 되어서야 패턴 파트에서 근무하는 미스터 .조가 갖다 놓았다는 걸 알았다.
평소 말이 없이 조용히 맡은 일만 열심히 하는 사 십대 중반의 미스터 조는 자기가 직접 접목을 시켜 키운 유자나무라 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흔하지 않은 과실나무니 잘 키워 보라며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퇴근 길에 집에 가져와 레몬 나무와 오렌지 나무 사이에 터를 잡아 조심스럽게 심고 물을 듬뿍 주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도 그 옆을 지날 때는 유심히 보게 된다. 그러나 서 너달이 지나도 누런 잎만 매단 채 전혀 변화가 없었다.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계절따라 쉴새 없이 가지가 휘어지게 열매를 달고 있는 레몬나무 사이에서 낮설음으로 어설프게 서 있었다. 마치 모든 익명성에 길들여진 내 나라에서 지구 반쯤을 돌아 이곳 얼 에이에 옮겨 앉아 아직도 채 뿌리내리지 못한 내 모습 같아 안스럽게 보였다.
실제로 유자나무는 감귤류로서 열대지방이 원산지다. 감귤류 중에서도 내한성이 가장 강한 유자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따뜻한 남해안 그 중에서도 고흥지방에서 많이 재배한다. 유자나무는 잎과 열매를 다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과일 껍질은 말려서 향신료로 쓰기도 하지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껍질째 썰어서 꿀에 재워 두었다가 몹시 피곤할 때나 감기기운이 있을 때 뜨거운 물에 넣어 마시기도 한다. 그 향과 맛이 그윽하여 금방 기분까지 좋아지게 된다. 또한 잎파리는 명절 때 특히 설날 찹쌀떡을 만들 때 방아간에서 볶은콩과 이파리를 넣고 함께 빻아 곱게 가루를 만들어 콩고물로 사용했다. 옅은 연두색을 띤 노란 빛갈도 곱지만 콩가루에서 나는 냄새가 향기롭고 특별했던 기억이 난다. 그 많은 나뭇잎 중에서 미세한 향내마저도 놓치지 않고 실생활에 이용하여 맛과 멋을 더 하여 생활의 영력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송편을 찔 때도 솔잎을 깔고 떡을 쩌서 향취를 내고 푸른색이 시각적인 맛을 돋우듯이.
옮겨 심은지 한 해가 지나고 봄이 왔는데도 더 자라지도, 잎파리 빛갈도 처음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도 차츰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올 봄 그 옆을 지나치려다 언뜻 본 유자나무는 새로 돋아난 잡초 한가운데 새 순을 자기 몸 길이 만큼 쑥 올려 놓고 있었다. 너무나 반갑고 대견하여 주위의 잡초를 제거해 주니 연초록 새순이 더욱 돋보였다. 내가 무심하게 보낸 사이 어두운 땅속에서 쉬지 않고 묵묵히 잔뿌리를 열심히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성목이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잊은 채 진득히 기다리지 못한 내 조바심이 부끄러웠다. 이제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긴 대공을 높이 올려으니 여름의 태양이 빛나면 연한 순들은 더욱 단단하게 초록빛으로 변할 것이다.
어느 때면 슬며시 내 꿈속에 보이는 고향의 옛집에 서 있었던 유자나무를 내 뜰에 심어 놓고 가끔은 옛 일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리라. 언젠가는 가지를 넓게 벌리고 열매 맺어 지나가는 바람에게 유자 향기 날려 보내고 먼 길 돌아온 작은 새들에게도 지친 날개 잠시 쉬어 갈 쉼터가 되어줄 것이다. 진초록 잎파리 무성하고 그 사이에 노란 열매들을 풍성하게 달고 있는 모습을 지금부터 상상해 본다.
박신아 프로필
전남 고흥 출생
미래문학 시 부분 신인상 수상
재미수필문학회 제 3회 수필공모 신인상 수상
한국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재미수필가협회 이사
글마루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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