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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문학

박봉옥의 수필 '시산도에서 하루'

by 고흥을 찾아서 2015. 7. 1.

 

 

시산도에서 하루

 

박봉옥

 

바다에 떠있는 섬들도 뭍을 그리워할까. 캄캄한 밤에 대월정(對月亭, 실은 보통 촌가이다) 마당에 서서 바다 건너 가물거리는 이웃 섬의 불빛들을 쳐다보니 뭍에서 한참 떨어져 나온 게 실감난다.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낚싯배를 타고 여러 섬을 지나 이곳 시산도로 깊숙이 들어왔으니 뭍이 보일 리 없다.

 

시산도를 향해 달려가는 선상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섬에 대한 환상과 초록빛 바다의 유혹에 도시의 번잡한 것들을 훌훌 털어 버릴 것 같았는데, 느닷없이 내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일다니 괴이한 노릇이다. 한번 오고 싶은 섬이 아니었던가.

 

낮엔 도시의 달려가는 자동차들, 바삐 움직이는 군상들, 늘 틀에 박힌 것들 대신에 누렇게 팬 보리밭, 방파제에 한가롭게 묶여있는 어선들, 아무렇게나 방치된 듯한 어구들 사이로 기어다니는 갯벌레들, 선외기를 타고 어장을 오가는 어부들의 모습에서 섬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꼈다.

 

어둑한 저녁엔 낚시꾼인 친구가 수중의 갯바위에서 애써 낚은 꽤 큰 감성돔 한 마리를 손수 회치고, 떠나올 때 가져온 곰장어를 구워 마을 사람들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만남의 정을 나누었다. 일행 중 나를 비롯한 몇몇을 빼고는 다들 구면이라 허물없이 걸쩍지근한 농담을 털어놓으며 회포를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중에 흥이 난 모두는 성이 차지 않아 섬 허리를 돌아서 동편 마을에 있는 이장 집으로 몰려가 노래방 기계의 반주에 맞춰 한바탕 놀았다.

 

그런데 여객선이 끊어지고, 육지와 차단되었다는 게 여간 삭막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고 사위가 고요한 한밤중, 홀로 어둠을 밀치고 있는 전주의 보안등마냥 나는 진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눈감고 잠을 청해보았지만 좀처럼 잠이 눈에 내리질 않았다. 갑갑한 마음에 섬과 육지를 이어주는 다리를 놓아야한다는 부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개구락지들의 요란스런 울음소리와 밤낮 쉬지 않고 텅텅텅 돌아가고 있는 전력용 발전기 소음이 섬과 밤의 적막을 깨고 있다. 곤히 잠자고 있을 가족들을 그리다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청명한 밤하늘에 크고 작은 별들이 뛰쳐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그만 별들이 무수히 깔려있는 저건 은하수 같고, 어릴 적 친구들과 밤하늘을 쳐다보며 즐겨 찾던 북두칠성을 찾으니 국자 모양의 일곱 개의 별들이 보이고 그 위에 북극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반갑다. 참 오랜만에 보는 별들이다.

 

누군가가 밖으로 나와 어둠 속에서 두리번거리며 나의 이름을 두 번 불러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밤 깊도록 이어지는 일행들의 술자리에서 살며시 빠져 나온 탓이다. 덜 닫힌 문틈 새로 방안의 불빛과 정담이 새어나왔다. 노래도 들려온다. 마을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시산가이다. 음정을 맞추려고 부르다가 멈추기를 되풀이한다.

 

산이 좋아 시산이요

물이 좋아 시산이라

산 좋고 물 좋다만

님이 없어 외롭구나

샛바람 하늬바람

비린내나는 정든 내 고향

내 고향 시산도가

나는 정말 못 잊겠네

 

해무가 어슬렁거리며 섬을 덮고 있다. 냉기가 엄습해온다. 난 보안등 주변을 보초처럼 서성거리며 색 바랜 책장을 넘기듯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들을 하나 둘 떠올렸다. …네킹콜의 too young을 멋지게 부르던 옛 동료, 술 취하면 집을 찾지 못해 한밤중 아파트를 오르내리며 초인종을 눌러대던 이웃 사람, 친형처럼 다정했던 선배 부부의 갑작스런 이혼, 애증이 교차하는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 구조조정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며 직장을 떠났던 사람들…. 그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도 그려보았다.

 

빨간 장미가 피어있는 한적한 주택가에서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담 너머 집안을 몰래 훔쳐보던 일, 장마 지던 날 어둔 하늘에 치는 천둥 번개가 무서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리는 비를 우두커니 바라보던 때, 친구들과 함께 종이배를 만들어 도랑에 띄우고 물길을 따라 뒤쫓아가던 일 등 뇌리에 남아있는 유년 시절의 추억들도 생각해냈다.

 

또 매사가 그랬듯이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잘 해결되었던, 막연한 고민 속에서 금세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일들과 예전엔 미처 몰랐던 행복했던 짧은 시간들과 길고 힘들었던 시간들의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가파른 해안 쪽에서 파도에 몽돌구르는 소리가 바람결에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들려온다. 성가시게 구는 모기들을 뿌리치며 나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별로 나아진 게 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미덥지 못한 존재이다.

 

동이 터 오려나, 별들이 많이 사라졌다. 외딴 유배지에서 자연을 벗삼아 고독한 삶과 강박감을 예술과 학문으로 승화시켰던 고산(孤山), 다산(茶山) 같은 선인들의 심사를 헤아려본다.

 

(2001 문학도시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