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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성지고흥

고흥을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한 거북선 초대선장 신여량장군 등을 모신 충의사를 찾아서

by 고흥을 찾아서 2015. 5. 28.

 

남양면 침교리 804-1 충의사는 고흥을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한 상징적 인물중의 한사람이자 거북선초대선장인 신여량장군(1564~1606) 등 14명을 기리는 사우로 1980년 준공한 사당, 강당, 내외사문, 관리사, 창고 등이 있다.

 

이 곳에는 문중 역대 선현공신인 고령신씨 5세조 신덕린, 6세조 신포시, 9세조 신석, 14세 신여량, 신여극, 신여정, 신영해, 신홍수, 신원방, 신산원, 신호원, 15세 신덕성, 신여식, 신직모 등을 1982년 배향했으며, 고령신씨 문중에서 매년 음력4월1일 제향하고 있다.

 

 

고흥출신 신여량은 1564년(명종 19) 동강면 마륜리 부친 홍해공과 모친 흥덕장씨 사이에 삼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86년(선조 19) 평안북도 의주지방 병마절제도위로 거란족을 토벌하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에 의해 압록강변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1591년(선조 24)에는 병조판서 김응남의 천거로 오위도총부부장을 지내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양과 의주로 몽진할 때 호종하고,

 

조방장으로서 당시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 싸움에서 연전연승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과 서로 연합작전을 꾀하여 고성 앞바다, 노량, 한산, 양대작전과 가덕 양 바다 싸움 등에 참전 하였고, 초대 거북선선장으로 언제나 선봉장이 되어 때로는 복병전으로 혹은 계선, 화전공법 등으로 종횡무진 분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우수수군첨정으로 특진되었으며, 조헌이 창의하여 옥천 대전을 수복하자 향리에서도 동생인 여기, 여정과 종제인 여극 그리고 종숙인 영해 원방 홍수 등 일가친척들을 비롯하여 가동 400여명과 향민 수천명을 모병하여 흥양의병총대장이 되어 권율의 막하에 작전 참모격인 절충장군 겸 영책(營責)이 되어 1593년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몫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향리 친척들과 창의하여 1598년 순천예교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통제영우후겸절충장군이 되어 고금도 앞 바다에서 대승하였다.

 

 

이순신과 합세하여 1598년 사천, 당포, 당항포 전투에 참가하여 철정(鐵釘 : 철못으로 만든 화살)·화전(火箭 : 불화살) 등을 사용하여 적선을 크게 무찔렀다.

 

1603년(선조 36) 목포앞 바다에서 출몰하는 왜적들을 토벌하는데 원군하여 대승을 거두어 주민들이 목포시청앞에 규휼선정공덕비를 세웠다.

 

 

1604년 7월 17일 선조는 당포해전의 빛나는 전공을 세운 전과를 인정받아 경상우도수군우후에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고 1605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올랐으나, 1606년 3월 절충장군 전라우수사로 진도벽진포에 남아 있던 왜적들과 싸우던 중 적탄을 맞아 세상을 떠났다.

 

그뒤 선조는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묘는 전남 고흥군 대서면 석치합곡에 있으며 나주충장사와 금산대첩단, 고흥 충의사에 여정, 여극과 함께 배향되었다. 인근 동강면 마륜리 815-1번지에는 신여량장군의 중절을 기리기 위한 정려가 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111호로 관리되고 있다.

 

 

신여극은 생졸년 미상이며 용해의 아들로 계미년에 등과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뒤 적량포만호(赤梁浦萬戶)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제종(諸從) 및 병사(兵使) 정걸(丁傑)과 일어나 전주에 갔는데 이때 권율이 도원수(都元帥)가 되자 가동(家僮) 300명을 시켜 양미(糧米) 300섬(石)을 수송하여 공부(公府)에 들이고,

 

진주성이 어려워지자 창의사(倡義使)김천일의 구원을 권율에게 청하기 위해 나서기도 했다.

 

조헌과 권율장군의 좌부장으로 행주전투에 여러 번 공을 세워 훈련원판관을 제수받았으며 사후에 좌승지(左承旨)를 증직(贈職)받고, 나주 충장사, 금산 대첩단, 고흥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신여정도 생몰년 미상이며 임진왜란 당시 형 여량과 함께 왕을 호종하고 뒤에 선전관이 되어 1597년 (선조 30) 정유재란 때 고금도전투에 나가 아홉 차례나 승리하였으므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되고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나주 충장사와 고흥 충의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