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사는 이순신 전승신화의 숨은 주역이자 판옥선을 발명하고, 해전경험이 없던 이순신에게 해전을 가르친 스승격의 인물 정걸장군(1514~1597), 그리고 정극인, 정운희, 정덕조 등을 기리는 사우로 매년 음력 3월 22일에 후손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정걸은 1544년(중종 39)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선전관을 지냈다. 1553년(명종 8) 서북면 병마만호를 지낸 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달량성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 만호가 되었다. 이듬해 부안현감을 거쳐, 1561년(명종 16) 온성도호부사, 1568년(선조 1)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 정벌과 국경 수비에 공을 세웠다.
그 뒤 1572년(선조 5)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1577년(선조 10)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578년(선조 11)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1581년(선조 14) 절충장군, 1583년(선조 16) 전라도 병마절도사, 1584년(선조 17) 창원부사, 1587년(선조 20)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 수군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1년(선조 24)에는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았으며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만들었고 화전, 철령전, 대총통 등 여러가지 무기를 만들었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과 함께 각종 해전에 참가해, 1592년 5월(선조 25)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이래, 7월의 한산도대첩에 이어 9월 부산포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2월(선조 26)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있으면서 행주대첩에 화살을 조달해 승리로 이끄는 데 힘쓰고, 다시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했으며, 6월 이순신의 요청으로 한산도에서 왜적을 방어하고, 12월에는 전라도방어사로 부임해 남서 해안에서 왜적 토벌에 전념하였다.
1595년(선조 28)에 정걸장군이 모든 관직을 사임하게 되자 선조임금은 말년까지 장군과 함께 지낼 선비 6분(미상)을 포함한 7인정(七印亭)을 세웠는데, 조선후기까지 남아 있었으나 잠시 없어진 것을 복원했으며 그의 귀향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느티나무 7그루는 5그루만 생존해 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선조 30) 83세의 일기로 순절했으며, 묘소는 추모비조차 없는 초라한 묘역이다. 태어난 곳 주변에 정걸장군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했다는 마석과 가정에서 사용했던 연자방아 상부 쪽이 남아 있고, 도로변에 유허비와 기적비가 후손들에 의해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교지 등 34점의 유물을 보관관리하고 있으며, 고흥 정걸가 교지류 고문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점에서 정걸과 그의 아들. 손자 3대가 남긴 무관사령장으로 역사적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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