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소설가 송은일(본명 송영란, 49세)이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금성마을의 경로당을 찾은 것이 계기다. 동네 어른들께 인사드리라는 어머니 분부 때문이었다.
문을 열자 100여명의 70∼90대 할머니들이 넓고 긴 방의 사면 벽에 등을 댄 채 한 무릎을 세우고 붙어 앉아 있었다. 마치 미라처럼 보이던 그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송 씨는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송 씨가 인사를 하자 할머니들이 붙잡았다. 수임이 큰딸로 소설가란 걸 알고 있던 할머니들은 “아이, 작가야. 니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쓴담시롱야? 내 이약 잔 써주라(내 이야기 좀 써주라).”며 서로 자기 인생을 들어보라며 각자의 삶을 털어 놓으며 와글와글 웃었다.
송 씨는 이 노인들이 돌아가시면 이 마을이 어쩌면 사라질지 모르고 한 시대가 가버릴 것 같은 느낌으로 계시는 동안 이분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느낀 저릿함으로 고향 할머니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장편소설 '매구 할매'를 썼다.
송 씨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휴머니즘 문학의 연장선상이며, 흔하디흔하고 가장 보편적인 우리네 삶의 이야기이다. 인물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갈등을 촘촘히 그려내며 평범한 소재를 비범한 이야기로 다듬어냈다.
매구는 천 년 묵은 여우가 변해서 된다는 전설의 짐승이다. 백 살까지 세고 그 다음부터는 세지 않는 매구 할매의 '나이 듦'이라는 것이 쇠약함과 추함의 문제가 아닌 자기의 삶을 완성해가는 의미로 보고 있으며, 구미호 같은 간사함이나 영악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어머니 같은 인물로 그려나간다.
송 씨는 책머리 작가의 말에 '소설의 배경이며 주인공이면서 도드라지지 않는 매구 할매는 각각으로 빛난 삶을 살아온 고향 할매들'이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나이 들어 현재에 이르렀지만 자신들의 삶에서는 주인공인 사람들이다. 백 살에도 빛날 수 있는 그들, 혹은 우리들!'이라고 썼다.
매구 할매는 4백년 된 계성재를 중심으로 그 가족들과 들고 난 수많은 식솔및 이웃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애환을 그리고 있다. 계성재 20대 류은현이 손인 작중 작가이자 주인공이다.
작품은 '은현'이 '매구할매'를 주인공으로 쓰는 소설과 90여년 전 '매구 할매'의 삶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90~100년 전 과거의 일이 아니라 할머니의 이야기를 소설 안에서 다른 현실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이라는 걸 표현하기 위해 현재와 오버랩하며 액자소설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문학을 전공한 류은현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사귀던 남자의 부인이 찾아와 강의를 그만두라고 강요한다. 추문이 두려운 은현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한다.
이미 두 권의 소설집을 출간한 은현은 그동안 준비하던 소설을 쓰기 위해 집안 대대로 내려오며 기록된 '계성재가솔부'를 아버지로부터 넘겨받는다. 은현은 매구할매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아, 집안 윗대 어른들의 행적을 추적하며 소설을 쓴다.
송 씨는 1995년에 광주일보 신춘문예 단편 소설 부문에 '꿈꾸는 실낙원'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들어섰으며, 2000년에는 장편 소설 '아스피린 두 알'로 여성동아 공모전에 당선됐고, 저서로는 '불꽃섬', '소울메이트' ,'반야' 등이 있다. 이번 '매구 할매'가 열 번째 장편이며, 작가의 고향인 고흥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은 첫 작품이다.
유씨와 송씨가 모여 사는 고향 금성마을에서 수십 년을 머물며 팔순을 넘기고 미수(米壽)를 넘긴 노인들을 보면서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글로 풀었으며, 작가의 집도 종가여서 따로 취재할 것 없이 몸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들을 뽑아내 썼다고 한다.
현대와 과거를 넘나들며 전개되는 이 소설은 살아 있는 듯한 인물들의 묘사와 감칠맛 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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