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아침이다. '본 분교 합동수업'을 하는 날이라 첫배를 타고가 초평항에 내렸다. 월요일 아침에 짐이 많아서 차를 선착장에 두었다. 사람들 통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빨리 차를 빼려고 잰걸음으로 갔다. 차 시동을 걸고 차를 돌리려고 왼쪽 창밖을 보는데, 할머니 한분이 잽싸게 다가와 뒷문을 연다. 놀라 바라보니 "버스 타는데 까지만 태워다 주시요." 하고 차에 오른다. 얼른 차에서 내려 뒷좌석을 정리해주었다.
평소에는 해변도로로 다니는데, 그날은 반대방향인 승강장이 있는 쪽으로 갔다. 승강장에 조금 못 미친 좁은 골목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다. 차가 통과할 수가 없어서 할머니를 그곳에 내려드렸는데, 내릴 때도 아무 말이 없었다. 차를 다시 해변도로 쪽으로 돌렸다. 그분도 젊었을 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질고 거친 세파에 부대끼다보니 예의와 염치를 잊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태도가 변한 것이지 본성이 변한 것은 아니다.
동식물들은 타고난 본성그대로 생활하는데, 사람은 왜 변하는 것일까? 예전에는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한 때 '대도'라고 불리던 사람이 개과천선하여 도둑을 계도하는 강사가 되었다. 그를 보고 대도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모두들 좋아했다. "대도는 의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다시 도둑질을 한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래서 사람이 변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악인이 선인이 되기는 무척 어려워도 선인이 악인이 되는 경우나 자기의 신념을 바꾸는 사람은 종종 볼 수 있다.
당이란 정치에 대한 이념이나 정책이 같은 사람들이 그 정치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 단체다. 그런데 몇 년 전 타 당을 수년 동안 신랄하게 비판하던 진보정당 광주 모 시의원이 어느 날 비판한 정당 출신이 이끄는 구청에 들어가 일을 했다. 얼마 전에는 중도 보수정당 국회의원이 그 당의 인기가 떨어지자 탈당하고 대세인 중도 진보정당에 입당하려다 실패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마했다. 그런데 최근 그는 다시 골수 보수정당 소속 대선후보의 대외협력특보를 맡았다. 그들은 본성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본성이 시류와 이권에 따라 행동하는 소인배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 물결위로 아련한 기억이 피어오른다. 십년 전 고흥 나로도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아이들이 현장체험학습을 떠난 휑한 교정에 촉촉한 바닷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바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조퇴를 내고 차를 팔영산 쪽으로 몰았다. 해창만을 막아 만들어진 호수위에서 흰머리에 검정 모자를 눌러쓴 노인이 작은 배를 띄워놓고 한가로이 세월을 낚고 있었다. 인적이 뜸한 산길에 들어서니 보따리를 든 할머니 한분이 멋쩍게 웃으며 손을 들고 서 있었다.
"어디에서 내려드리면 되나요?"하고 물으니, 할머니는 되레 "어디까지가요?"하고 물었다. 팔영산 휴양림에 간다고 하니, "우천리가 집인디, 쭉 가다가 삼거리에서 나 내려주고 왼쪽으로 가면 돼요."하신다. 가는 곳까지 모셔다드리겠다 해도 사양하며 자신의 행동이 염치없음을 자책한다. 버스시간이 맞지 않아 한 시간을 걷다가 너무 힘들어서 손을 들었단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삶의 궤적인 듯 굽어있었다. 하지만 그 연세까지 염치를 간직하고 사시는 할머니가 소녀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단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 시인 윤동주와 김남주는 변하기 전에 죽은 것일까? 혼란스럽다. 보수에서 점점 진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권에 따라 진보 쪽에서 보수 쪽으로 가는 것은 원래 보수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차라리 모두 변하지 말고 악인은 악인 그대로, 의인은 의인 그대로, 보수는 보수 그대로, 진보는 진보 그대로, 제발 처음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아침 새삼 우천리 할머니가 그립다.
출처 : 전남일보 https://www.jnilbo.com/view/media/view?code=2021090715270309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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