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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성지고흥

12월 18일 고흥문화회관에서 '명장 정걸장군 재조명 학술대회' 개최

by 고흥을 찾아서 2014. 12. 16.

 

오는 12월 18일 오후2시 고흥문화회관 김연수실에서 고흥군이 주최하고 국립순천대학교박물관이 주관하는 '명장 정걸장군 재조명 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고흥이 낳은 조선중기의 명장 정걸장군에 대한 삶과 업적, 임진왜란 당시 활약, 관련 유적 및 유물 등의 자료를 집대성하여 장군의 위상을 드높이고 아울러 임진왜란 당시 고흥이 가졌던 의의를 조명하는데 있습니다.

 

정걸장군은 1514년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출생하여 30세때 무과에 급제한 후 50년이상 무관생활을 했으며 임란이전 시기에 수군과 육군의 고위직을 역임했습니다.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이순신을 도와 영화 명량에 나왔던 조선수군의 핵심 판옥선을 제작하고 화전, 철령전, 대총통 등 무기를 만들었으며, 나대용, 송덕일 등과 함께 거북선 건조에도 힘썼습니다.

 

1592년 5월 옥포해전과 7월 한산도대첩, 9월 부산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1593년 2월 당시 충청수사로 행주대첩에 무기가 떨어져 곤란을 겪자 화살을 가득실은 배 두척을 몰고 적의 후방을 찔러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고, 다시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했으며, 12월에는 전라도방어사로 부임해 남서 해안에서 왜적 토벌에 전념했던 명장입니다.

 

1597년 83세의 일기로 타계했으며,당시 흥양전선소 덕흥선소가 내려다보이는 도화면 유주산 산자락에 진입로도 없이 기념비도 없는 초라한 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고흥군 포두면에는 정걸장군을 비롯 8분을 모신 안동사가 있고, 우주로 도로변에는 자헌대부병마절도사 정걸유허비와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선조임금이 하사했다는 칠인정 복원건물과 느티나무 7그루 중 5그루, 마석과 연자방아 상부 등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순신장군보다 31세나 많고 20년 앞서 수군절도사를 여러번 했으며, 육전과 수전에 통달한 최고의 전술가로 해전경험이 전무한 이순신을 도와 임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를 기리는 허물어져가는 사당을 바라보며 이순신장군에 가려 잊혀진 그의 이름에도 공적에 따라 재조명되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정걸장군 약력

 

1514년(중종5년)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출생1544년(중종39년) 무과급제 1553년(명종8년) 서북병마만호(평안북도 의주) 1555년(명종10년) 남도포수군만호(전남진도) 1556년(명종11년) 부안현감 1561년(명종13년) 온성도호부사 1568년(선조1년) 종성부사 1572년(선조5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1577년(선조10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578년(선조12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1581년(선조14년) 절충장관 1582년(선조15년) 장흥부사 1583년(선조16년) 전라도병마절도사 1584년(선조17년) 창원부사 1587년(선조20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 1591년(선조24년) 전라좌수영 조방장(왕의 직속으로 절도사의 조언자또는 감독관) 1592년(선조25년) 충청도수군절도사(임진왜란) 1593년(선조26년) 전라도방어사 1597년(선조30년) 83세 일기로 순절

 

유적 등 관련사진 http://blog.daum.net/kimyoungjin1/7449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