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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성지고흥

조선 최고의 돌격장, 최고의 전선 판옥선을 만든 정걸장군의 유적을 찾아서

by 고흥을 찾아서 2014. 9. 22.

<▲ 안동사 전경>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마을 안동사를 찾았다. 조선 최고의 돌격장이자 최고의 전선 판옥선을 만든 정걸장군(1514~1597) 등 8명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안내판 뿐만아니라 현판도 적혀있지 않았으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 안동사 정문>

 

가까스로 연락된 송정 정걸장군 직계40대 본손이라는 정종욱님과 관리인 정종주님의 안내로 들어 설 수 있었다.

 

<▲ 안동사 승유재 전경>

 

정걸장군은 판옥선을 발명하고 해전경험이 없던 이순신에게 해전을 가르친 31년 연상의 대선배이자 스승격의 인물이다.

 

<▲ 안동사 승유재>

 

이순신 보다 20년 앞서 수군절도사를 여러 번 했으며 육전과 수전에 달통한 최고의 전술가였다.

 

<▲ 안동사 제당 전경>

 

조선 수군의 핵심 판옥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실어 실전에 활용할 수 있도록 연습시켰으며, 당시 판옥선 11척과 정병 1,000명 이상의 실전 가능한 병력을 키워냈다.

 

<▲ 안동사 제당>

 

그가 있었기에 전라좌수영은 실전에 투입돼 승전을 거둘 수 있었고 이순신도 이름을 빛낼 수 있었다.

 

<▲ 삼정마을 느티나무3그루>

 

정걸장군의 자(字)는 영중(英中)이고 호(號)는 송정(松亭)이다. 1514년 12월 2일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 전동마을 느티나무 1그루>

 

1544년(중종 39)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선전관을 지냈다. 1553년(명종 8) 서북면 병마만호를 지낸 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달량성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 만호가 되었다. 이듬해 부안현감을 거쳐, 1561년(명종 16) 온성도호부사, 1568년(선조 1)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 정벌과 국경 수비에 공을 세웠다.

 

<▲ 전동마을 느티나무 1그루>

 

그 뒤 1572년(선조 5)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1577년(선조 10)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578년(선조 11)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1581년(선조 14) 절충장군, 1583년(선조 16) 전라도 병마절도사, 1584년(선조 17) 창원부사, 1587년(선조 20)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 수군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 정걸장군 생가터, 현 길두교회>

 

1591년(선조 24)에는 전라좌수영 경장(조방장)으로 임명받았으며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만들었고 화전, 철령전, 대총통 등 여러가지 무기를 만들었다.

 

<▲ 안동마을 연자방아, 정종욱님 댁 입구>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과 함께 각종 해전에 참가해, 1592년 5월(선조 25)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이래, 7월의 한산도대첩에 이어 9월 부산포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 안동마을 마석, 정종욱님 댁>

 

1593년 2월(선조 26)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있으면서 행주대첩에 화살을 조달해 승리로 이끄는 데 힘쓰고, 다시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했으며, 6월 이순신의 요청으로 한산도에서 왜적을 방어하고, 12월에는 전라도방어사로 부임해 남서 해안에서 왜적 토벌에 전념했다.

 

<▲ 안동마을 7인정>

 

1595년(선조 28)에 정걸장군이 모든 관직을 사임하게 되자 선조임금은 말년까지 장군과 함께 지낼 선비 6분(미상)을 포함한 7인정(七印亭)을 안동마을에 세웠는데, 그의 귀향을 기념하기 위해 느티나무 7그루를 심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선조 30) 83세의 일기로 순절했다.

 

<▲ 정걸 자 정연, 손 정홍록 묘지, 안동사 옆길 경유>

 

정걸장군 뿐만아니라 그의 아들 정연도 영광군수를 지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흥에서 의병을 모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전투에서 1598년에 순절하였고, 그의 손자 정홍록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흥덕전투에 참전했다가 1599년에 순절하여 3년 동안 3대가 순절하고 마지막 남은 증손자 정엽이 성장하여 독자집안 손을 이어내려 오고 있다.

 

<▲ 안동마을 제당>

 

정걸장군이 태어난 후동 마을(현 길두교회 터) 주변에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했다는 마석이 남아있고, 화재로 옮겨진 안동마을 종가집 현 정종욱님의 집과 진입로에 마석과 가정에서 사용하던 연자방아 상부 쪽이 남아 있다.

 

<▲ 안동마을 기적비>

 

안동마을의 7인정(七印亭)은 조선후기까지 남아 있었으나 잠시 없어진 것을 복원했으며 그의 귀향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느티나무 7그루 중 5그루(삼정마을 3, 전동마을 2)가 생존해 있다.

 

<▲ 안동마을 신도비>

 

우주로 도로변에는 자헌대부 병마절도사 정공걸 유허비와 기적비가 후손들에 의해 세워져 있다.

 

<▲ 정걸 교지>

 

임진왜란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교지 등 34점의 유물을 보관관리(*2014년 7월8일부터 9월28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 기획전시실 "남도문화전 V- 고흥"전에서 특별전시)하고 있으며, 고흥 정걸가 교지류 고문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점에서 정걸과 그의 아들. 손자 3대가 남긴 무관사령장으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 유주산 정걸묘지>

 

도화면 구암리 구암저수지 옆 흥양전선소가 내려다보이는 유주산 정걸 장군이 누워 있는 묘소는 기념비조차 없이 초라하고 그 주변은 석산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영화 ‘명랑’에서 승리의 주역이였던 판옥선을 만든 정걸장군 그의 400여년전 혼신의 노력을 다한 그의 행적이 이대로 묻혀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