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초 김연수의 수제자 오정숙의 기적비로 2009년 7월 국창 오정숙선생 추모비 건립위원회에서 고흥문화회관에 세웠다.
오정숙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김연수제 춘향가 기예능보유자이다.
오정숙은 어려서 어른들에게 판소리 기초를 배웠다. 선고께서 오삼룡이라하는데 전주태생으로 명창이었다. 14세때부터 17,8세까지 우리 국악단 단원으로 수행하였다. 이 단체에는 박옥진, 박복아, 조양금(박병기 부인)등이 활동했다.
21세때부터는 창극활동을 그만두고 판소리학습과 공연에 주력했다. 23세때에 상경하여 김소희에게 심청가 범피증류를 배웠다. 24세때부터는 은거하고 있다가 1962년에 김연수선생 전수생이 되었고 그때부터 김연수선생에게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를 공부하였다.
오정숙은 1972년부터 매년 판소리 한바탕씩 완창발표회를 가졌는데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순이었다. 1977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지금까지 창극활동을 하고 있으며 1982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기예능보유자 후보로 인정되었고 전주대사습 1회 장원, 남도 판소리 명창부 1회 장원을 하였다.
국립창극단 지도교수 및 서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양대 등 모든 학교의 출강을 중단하고 향리인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315번지에 스승인 동초 김연수 선생님의 아호를 따서 동초각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사단법인 동초제 판소리 보존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동초제 판소리의 전 국민 보급과 보존 육성에 노력하였다.
이 사진은 위 기적비 좌측에 위치한 추모비 전문이다. 내용소개는 생략한다.
다음은 동초 김연수선생과 오정숙과의 끈질긴 인연을 소개한다.
`동초제(東超制)'의 시조인 김연수(金演洙 1907-1974)와 그의 수제자 오정숙(吳貞淑)명창사이의 사제간 정은 소리꾼 세계에서도 귀감이 되어 자주 회자되곤 한다. 죽는 날까지 자신의 예술적 영혼을 제자에게 물려주려 했던 스승으로서의 도(道)와 그같은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제자의 도(道)가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1974년 3월 7일 나이 마흔을 앞둔 오정숙 명창의 동초제 `수궁가' 발표회가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72년 `춘향가', 73년 `흥부가'에 이은 3번째 완창 발표회였다. 오정숙과 후견인 배기봉, 당시 최고의 고수였던 김동준, 여류고수 장송학 등 네 사람은 동초 김연수가 말년을 의탁하고 있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달동네의 김연수 여동생 집에 들어섰다. 발표회를 앞두고 병환 때문에 공연장에 참석 못하는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고 `마지막 수업'도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김연수는 간경화로 인해 배에 복수가 차 누워있기도 힘들어했다. 배기봉의 도움으로 등에 이불을 괴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김연수는 방사이의 미닫이를 떼고 건넌방 방바닥에 돗자리를 깔라고 일렀다.
눈물을 억지로 훔친 오정숙은 어렵게 소리를 이어가고 김연수는 흡족한 부분이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못마땅하면 고개를 가로 젓는 `고개짓 수업'이 계속됐다
이렇게 소리공부는 3시간 30분 넘게 계속됐으며 마지막 대목을 부를 때는 제자에게 마지막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는 뜻에서인지 김연수의 흐뭇한 얼굴에 눈물이 번져 나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정숙 일행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틀후, 그러니까 오정숙의 발표회 날인 9일 새벽 2시에 김연수는 기어이 눈을 감고 말았다. 오정숙의 주변 사람들은 스승에 대한 정이 각별한 오정숙이 발표회를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 알리지 않기로 했다.
오후 2시 발표회 시작을 앞두고 국립중앙극장 소극장 입구에 서있던 배기봉 일행은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김연수의 사망소식을 오정숙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에따라 무대 화장과 의상을 맡았던 국악인 박송희씨는 오정숙이 평소 즐겨 듣던 라디오를 못듣게 하고 그녀가 무대에 올랐을때 객석 여기 저기서는 훌쩍였다.
발표회 후반부 예정과 달리 김동준 고수 대신에 동초 선생님의 지정고수였던 이정업씨가 들어가 우느라고 북을 제대로 못칠 정도였다. 발표회를 마치고 무대에 털썩 주저 앉아 엉엉 울면서 김연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한다.
오정숙은 눈물과 화장이 섞여 범벅이 된 채 버선발로 스승의 영전 앞으로 달려갔다. 스승의 초상을 치른 오정숙은 `동초제' 소리의 맥을 잇는 것만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믿게 된다.
그 이듬해인 75년에 심청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으며 `적벽가'는 동아방송에 있던 스승의 녹음 테이프를 빌려다가 독습해 76년에 완창 발표회를 열었다. 5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완창 발표회를 가진 것이다. 이렇게 오정숙은 박동진 명창에 이어 판소리 다섯 바탕의 완창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이후 오정숙은 김포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스승의 유해를 9년만에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으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며 동초 김연수가 평생 창극 발전을 위해 몸 담았던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 그의 흉상을 제작해 제막식도 성대하게 열었다.
그리고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스승의 호를 딴 `동초각'를 짓고 동초제 소리를 이어가기 위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고흥에 동초국악제와 동초대상 추진, 기념관 건립 등 동초제 판소리 보존을 위해 노력해 오시다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2008년 7월 향년73세로 타계하여 원광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국악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고인의 스승인 동초 김연수 선생이 잠들어 있는 전남 고흥 금산면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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