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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역사인물

고흥의 역사적 인물(문인)

by 고흥을 찾아서 2013. 11. 4.
※ 문인(文人) 우리나라 고전문학은 운문문학(韻文文學), 서정문학(敍情文學)으로 향가(鄕歌), 고려가요(高麗歌謠), 경기체가(景幾體歌), 시조(時調), 가사(歌辭), 악장(樂章), 한시(漢詩), 산문(散文), 수필(隨筆) 등이 있다. 이러한 고전문학이 본 군에서도 창작되어 전해오는 것이 있는지 조사된바 없다. 유고와 문집이 남아 있는 인물들은 이미 1966년에 발간된 고흥군지에 실려있다. 이를 정리하여 기록하면 다음 표와 같다.

* 유고 및 문집 일람표
성 명
본관
약 사 (略 史)
거주지
고제신(高濟信)
장흥
재봉(齋峯) 경명(敬命)의 후손으로 경사에 통달하여 후진양성에 공헌하였다.  
곽형무(郭亨武)
현풍
원진(元振)의 후손으로 널리 경사를 연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곽시종(郭時鍾)
수묵(修默)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나 행의 주밀하였다.  
강위상(姜渭商)
진주
민첨(民瞻)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나 행의 주밀하였다.  
강치무(姜致武)
민첨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소실된 향교를 형(兄) 익무(翊武)와 더불어 예조에 상소하여 윤허를 받아 옛터에 복원하였다.  
강구규(姜球圭)
민첨의 후손으로 문사가 뛰어나 배우러 오는자 많았다.  
공환동(孔煥東)
곡부
관효(瓘孝)의 증손으로 시문에 능하고 필법이 뛰어났다.  
공지홍(孔智洪)
관효의 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공승홍(孔承洪)
계남(啓南)의 아들로 문망이 높았다.  
공혁로(孔奕魯)
운영(雲榮)의 아들로 경사에 통달하고 필법이 해정하였다. 풍양 상림
공우홍(孔瑀洪)
곡부
문하(文河)의 손자로 문사가 뛰어났다.
공채홍(孔寀洪)
지홍(智洪)의 아우로 문학이 뛰어났다.
공윤홍(孔潤洪)
관효(瓘孝)의 후손으로 사부(詞賦)에 능하고 경전에 밝았다.
공제국(孔濟國)
수홍(壽洪)의 아들로 경사에 통달하고 필법이 해정하였다. 풍양 상림
공낙호(孔洛鎬)
구준(球晙)의 후손으로 문예에 자질이 뛰어나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김정석(金廷錫)
김녕
준(遵)의 후손으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김일석(金日錫)
준의 후손으로 경전에 밝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홍섭(金洪燮)
문반(文班)의 아들로 경사에 밝았다.  
김윤선(金允瑄)
준영(俊榮)의 후손으로 문예가 뛰어나고 필법이 해정하였다.  
김영봉(金永奉)
준의 후손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김훈석(金勳錫)
양우(良佑)의 후손으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문인이다. 점암 안치
김인석(金仁錫)
종환(鐘桓)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고 빈민을 구제하였다.  
김진서(金珍瑞)
준영(俊榮)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두원 관덕
김정석(金楨錫)
두린(斗璘)의 손자로 문학이 숙취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영하(金永廈)
준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김유습(金有濕)
주부(主簿) 유흡(有洽)의 아우로 문학이 뛰어났다. 과역 가산
김장오(金長五)
김녕
성일(聲一)의 아들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를 널리보았다.  
김기서(金起西)
기추(起秋)의 아우로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문사가 풍부하였다. 과역 가산
김사국(金思國)
효자편 참조
김현국(金賢國)
사국의 아들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으로 문학에 밝았다.  
김인대(金麟大)
준의 후손으로 경서에 밝았다.  
김기휴(金基休)
사국(思國)의 아들로 시서에 능하였다.  
김기일(金基一)
준의 후손으로 문학에 능하고 효성이 뛰어났다.  
김낙용(金洛鏞)
문기(文起)의 후손으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인으로 효성이 뛰어났다.  
김상익(金相翊)
문기(文起)의 후손이다. 풍양 율치
김두석(金斗錫)
준의 후손으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김재호(金載鎬)
준영(俊榮)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두원 관덕
김흥식(金興植)
김해
영순(永純)의 후손으로 경사에 정통하였다.  
김필규(金弼奎)
응인(應仁)의 증손으로 문학이 뛰어나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김경영(金敬永)
정암(靖菴) 간(侃)의 5세손으로 시문에 능하고 필법이 엄정하였다.  
김영곤(金寧坤)
창유(昌有)의 후손으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며 문학이 뛰어났다.  
김상천(金相天)
김해
학천군(鶴川君) 극조(克*)의 후손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김종화(金鐘華)
목경(牧卿)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고 효성이 뛰어났다.  
김상섭(金庠燮)
병용(柄鏞)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김국귀(金國龜)
일손(馹孫)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여 종학자가 많았다.  
김한경(金漢敬)
극검(克儉)의 후손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필법이 엄정하였다.  
김학무(金學武)
한경의 손자로 경전에 밝아 많은 후학을 길렀다.  
김무택(金茂澤)
경영(敬永)의 손자로 문장이 뛰어나고 필법이 정엄하였다.  
김병룡(金炳龍)
무택(茂澤)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재영(金在永)
진규(鎭奎)의 손자로 문학이 섬부하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김병완(金秉浣)
방려(方礪)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나고 행의가 주밀하였다.  
김병규(金丙珪)
한중(漢仲)의 손자로 시부(詩賦)에 능하였다.  
김병무(金秉武)
방려(方礪)의 후손으로 학문이 깊고 필법이 엄정하였다.  
김중원(金中源)
문사(文辭)가 섬부하고 필력이 강건하였다.  
김대섭(金大燮)
경영(敬永)의 현손으로 문사 웅건하고 시문에 능하였다.  
김언섭(金彦燮)
기환(琪煥)의 아들이다.  
김용수(金龍洙)
김해
두환(斗煥)의 아들로 학행이 독실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김재기(金在基)
김해
진성(振聲)의 아들로 경사에 정통하고 제세(濟世)의 뜻이 있었다.  
김동채(金東采)
방려(方礪)의 후손이다.  
김하정(金夏鼎)
우정(禹정)의 아우로. 문사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다.  
김노발(金魯發)
정(睛)의 후손이다.  
김노규(金魯圭)
위성(緯星)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김성기(金晟棋)
문기(文起)의 후손으로 기노사(奇蘆沙) 문인 문망이 높았다. 풍양 율치
김 직(金 稷)
욱(稶)의 아우로. 기노사(奇蘆沙) 문인으로 문사가 뛰어났다.  
김태형(金台衡)
흥세(興世)의 증손으로 기우만(奇宇萬) 문인이며 시례(詩禮)에 밝았다.  
김세형(金世衡)
직희(稙喜)의 아들이다.  
김학제(金學濟)
경주
상조(商祚)의 아들로 문망이 높았다.  
김세신(金世信)
충한(沖漢)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남열(金南烈)
문기(文起)의 후손으로 전간재(田艮齊)의 문인으로 문학과 효행이 뛰어났다.  
김동희(金東禧)
문기의 후손으로 전간재(田艮齋)의 문인이며 문학이 뛰어났다.  
김식문(金植文)
위성(緯星)의 후손이다.  
김천연(金天*)
광산
태현(台鉉)의 후손으로 문장에 뛰어났다.  
김양원(金良源)
광산
태현의 후손으로 경사에 통달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정현(金正炫)
석견(石堅)의 후손으로 문학이 저세(著世)하였다.  
김성견(金性堅)
안동
시중(侍中) 학(鶴)의 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익한(金翊漢)
여반(汝班)의 현손으로 경사에 밝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김영년(金永年)
학(鶴)의 후손이다.  
남억창(南億昌)
의령
충경공(忠景公) 재(在)의 후손으로 경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남태원(南台元)
재(在)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맹후립(孟後砬)
신창
순남(舜南)의 아들로. 문학이 정수하였다.  
맹달호(孟達浩)
길원(吉源)의 아들로 노사(蘆沙) 임고산(任鼓山)문인으로 문학이 저세하였다.  
맹흥호(孟興鎬)
문정공(文貞公) 사성(思誠)의 후손으로 기노사(奇蘆沙) 문인이며 문학이 저세하였다.  
맹선영(孟善榮)
용수(龍洙)의 아들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문인이며 학문이 깊고 언행이 단정하였다.  
로민식(盧玟植)
광산
자형(自亨)의 후손으로 경사를 섭렵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문재희(文在禧)
남평
시환(時煥)의 조카로 문사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 연(柳 演)
고흥
충서(忠恕)의 증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성명(柳星明)
충서의 후손으로 문사가 풍부하여 전주교수가 되었다.  
류만형(柳萬亨)
고흥
통덕랑(通德郞) 회(檜)의 아들로 문장과 행의가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류만춘(柳萬春)
익의 아들로 여러차례 향시에 합격하였다.  
류만서(柳萬瑞)
익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류정홍(柳挺洪)
충서(忠恕)의 후손으로 문학과 행의가 뛰어났다.  
류동욱(柳東郁)
시영(時榮)의 증손이며 문예가 뛰어났다.  
류성표(柳星杓)
진기(震起)의 아들로 시서(詩書)에 능하고 효행이 뛰어났다.  
류동휘(柳東輝)
시영(時榮)의 증손으로 경사를 섭렵하였다.  
류희탄(柳希綻)
부사(府使)동기(東起)의 손자로 효성이 뛰어나고 문학에 밝았다.  
류동무(柳東楙)
만서(萬瑞)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류광진(柳匡晉)
성삼(星三)의 손자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류규채(柳奎彩)
희룡(希龍)의 6세손으로 경학(經學)에 밝았다.  
류규성(柳奎成)
사렴(師濂)의 아들로 학문이 뛰어났다.  
류제렴(柳濟濂)
동휘(東輝)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류 단(柳 壇)
동기(東起)의 증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류성학(柳聖學)
춘신(春新)의 아들로 용의단정하고 문학이 뛰어났다.  
류직휴(柳稷休)
고흥
순(淳)의 7세손으로 경학과 예학에 밝았다.  
류 경(柳 坰)
희탄(希綻)의 아들로 학문이 뛰어났다.  
류관영(柳灌榮)
순(淳)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년석(柳年錫)
희룡(希龍)의 후손으로 예학에 밝았다.  
류정석(柳廷錫)
희룡(希龍)의 후손으로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류동협(柳東協)
연(沇)의 아들로 문학에 밝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환철(柳煥哲)
충서(忠恕)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지호(柳志浩)
일영(日榮)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형호(柳馨浩)
부사(府使) 동기(東起)의 5세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류정섭(柳廷燮)
생원(生員) 세광(世光)의 아들로 경학에 밝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류영은(柳榮銀)
윤(潤)의 6세손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류문성(柳文*)
순(淳)의 9세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류석기(柳碩基)
정섭(廷燮)의 아들로 경사에 밝고 필법이 뛰어났다.  
류옥석(柳玉錫)
희룡(希龍)의 7세손으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영립(柳永立)
용호(龍浩)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종호(柳鐘浩)
고흥
순(淳)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정석(柳正錫)
충신(忠信)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규호(柳圭浩)
광진(匡晉)의 후손으로 문학에 밝고 행의가 착실하였다.  
류호석(柳浩錫)
시영(時榮)의 6세손으로 경사에 밝고 매사에 청백하였다.  
류진숙(柳鎭肅)
치수(致壽)의 아들로 경사에 통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동일(柳東日)
성진(成震)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류상호(柳相浩)
성일(星一)의 현손으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류면호(柳勉浩)
규호(圭浩)의 아우로 문학에 밝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류기근(柳基根)
영묵(永默)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류신호(柳信浩)
두환(斗煥)의 손자로 학문이 뛰어나고 빈민을 구제하였다.  
류진구(柳鎭九)
충서(忠恕)의 후손으로 예학(禮學)에 밝았다.  
류옥근(柳沃根)
동무(東楙)의 5세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류영명(柳永蓂)
일영(日榮)의 손자로 학문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종하(柳鐘廈)
순(淳)의 후손으로 박섭경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영주(柳永柱)
삼석(三錫)의 아들로 효성이 뛰어났다.  
류영문(柳永文)
고흥
종흡(宗*)의 아들로 문사숙취하므로 배우러 오는자 많았다.  
류용근(柳龍根)
삼석(三錫)의 손자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철호(柳喆浩)
하림(夏霖)의 손자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찬호(柳燦浩)
하림의 손자로 시문에 능하였다.  
류재길(柳再吉)
환철(煥哲)의 증손으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영숙(柳永淑)
면호(勉浩)의 아들로 문사가 뛰어났다.  
류성대(柳星大)
치수(致壽)의 손자로 학문이 깊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정홍(柳正洪)
춘욱(春郁)의 증손으로 사부(詞賦)에 능하였다.  
류경준(柳敬浚)
일영(日榮)의 증손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류완근(柳浣根)
준석(濬錫)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대영(柳大榮)
당(塘)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사영(柳思榮)
희탄(希綻)의 손자로 경사에 밝았다.  
류영태(柳榮台)
동발(東潑)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류상하(柳相厦)
재원(再源)의 아들로 박섭경사하였다.  
류영의(柳永毅)
성일(星一)의 5세손으로 사림(士林)의 영수, 후진을 회척하였다.  
류중락(柳重洛)
고흥
순(淳)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류영지(柳永志)
찬호(燦浩)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류근홍(柳根洪)
충서(忠恕)의 후손으로 문사가 풍부하였다.  
류태근(柳泰根)
충신(忠信)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류영천(柳永川)
참판 충서(忠恕)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홍근(柳洪根)
탁(濯)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중회(柳重淮)
순(淳)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류효근(柳孝根)
영필(永弼)의 아들로 문행이 있었다.  
류중기(柳重淇)
순(淳)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고 의리에 밝았다.  
류면근(柳勉根)
영순(永淳)의 아들로 덕행과 문학이 겸비하였다.  
류인근(柳仁根)
성대(星大)의 아들로 일찍이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류 성(柳 晟)
습(濕)의 후손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류진석(柳珍錫)
명기(明基)의 아들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문인으로 문학이 풍부하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류종열(柳鍾烈)
영일(永日)의 아들로 경서와 시문에 능하였다.  
류윤근(柳潤根)
주부 충신(忠信)의 후손으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류정식(柳呈湜)
고흥
충서(忠恕)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고 필법에 정묘하였다.  
류중홍(柳重洪)
근식(根湜)의 손자로 학문과 덕행이 있었다.  
류기석(柳淇錫)
중락(重洛)의 아들로 학행이 있었다.  
류맹국(柳孟國)
왈길(曰吉)의 손자로 경사에 밝았다.  
류서용(柳敍鏞)
종순(鍾純)의 손자로 언행이 단정하였다.  
류중재(柳重栽)
병채(炳采)의 아들로 학문이 깊었다.  
류언근(柳彦根)
명호(明浩)의 손자로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었다.  
류 행(柳 突)
원곤(元坤)의 현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류영봉(柳永俸)
진운(鎭泮)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류형일(柳亨日)
순(淳)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류하근(柳夏根)
광안(匡顔)의 현손으로 문학과 행의가 독실하였다.  
류성근(柳聖根)
광모(匡模)의 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고 행의 독실하였다.  
류채일(柳采日)
만춘(萬春)의 후손으로 효성과 우애를 겸비하고 학문이 풍부하였다.  
류원휘(柳元暉)
영의(永毅)의 아들로 시례(詩禮)에 능하였다.  
류중섭(柳重涉)
면식(勉湜)의 손자로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문인이며 문사가 뛰어났다.  
류석용(柳碩鏞)
고흥
종순(鍾純)의 손자로 문필이 뛰어났다.  
류남진(柳南玲)
시영(時榮)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박정주(朴挺宙)
진원
현감 정영의 아우로 문학이 뛰어났다.  
박희석(朴禧錫)
정영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났다.  
박회석(朴繪錫)
동동익(東翊)의 아들로 문학에 정통하였다.  
박찬선(朴燦璿)
정영의 증손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박찬민(朴燦玟)
찬영(燦瑛)의 아우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박찬순(朴燦珣)
동익(東翊)의 손자로 경사에 박통하였다.  
박예빈(朴禮彬)
동익(東翊)의 증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박수현(朴壽炫)
태빈(兌彬)의 아들로 문학을 겸비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박철현(朴喆炫)
욱빈(郁彬)의 아들로 효성이 지극하고 문학이 뛰어났다.  
박이현(朴履炫)
욱빈의 아들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인으로 해서 전서에 능하였다.  
박중언(朴重彦)
찬영(燦瑛)의 증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박중기(朴重紀)
상빈(尙彬)의 손자로 문학에 능하였다.  
박지원(朴之源)
종률(鍾律)의 아들로 시례에 능하였다.  
박중희(朴重熺)
진원
호석(祜錫)의 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박중륜(朴重倫)
이현(履炫)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박세진(朴世鎭)
중귀(重龜)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박중면(朴重勉)
철현(喆炫)의 아들로 기송사(奇松沙)의 문인이며 경술국치후 두문분출하였다.  
박봉진(朴鳳玲)
중협(重協)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박양진(朴亮玲)
팔현(八炫)의 손자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박기진(朴箕玲)
희중(熙中)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박태준(朴泰俊)
중륜(重倫)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박동신(朴東信)
밀양
충원(忠元)의 후손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문인이였다.  
박준택(朴準澤)
교진(敎鎭)의 아들로 기송사(奇松沙) 문인으로 학문이 풍부하였다.  
박봉래(朴鳳來)
무인(茂仁)의 증손으로 학문이 깊었다.  
박계근(朴啓根)
영석(永錫)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박정기(朴正基)
눌생(訥生)의 후손으로 문필이 주밀하였다.  
박영기(朴永琪)
윤진(潤鎭)의 아들로 학문이 높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박기진(朴沂鎭)
종주(宗柱)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박계승(朴桂升)
밀양
문원(*元)의 후손으로 문사가 풍부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박문하(朴文厦)
기유(基裕)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박명순(朴命淳)
숭원(崇元)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박몽덕(朴夢德)
경신(景愼)의 후손으로 문행(文行)이 저세하였다.  
박수채(朴受采)
춘화(春華)의 후손으로 학식이 고명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박태화(朴泰和)
의엽(宜燁)의 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고 예학에 밝았다.  
박진규(朴震圭)
창원
회(懷)의 아들로 효행이 있었다.  
박창의(朴昌義)
홍세(弘世)의 후손으로 성리학에 통달하였다.  
박창헌(朴昌憲)
령(齡)의 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여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박세린(朴世麟)
창즙(昌楫)의 아들로 학문이 풍부하여 찾아 오는 학자가 많았다.  
박세징(朴世澄)
진원(震元)의 손자로 문학이 섬부하고 효행이 뛰어났다.  
박내효(朴來孝)
세징(世澄)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박상두(朴相斗)
세린(世麟)의 손자로 문예가 높았다.  
박상현(朴祥炫)
의엽(宜燁)의 후손으로 경사에 통달하였다.  
박종한(朴鍾漢)
성효(聖孝)의 중손으로 성리학에 밝았다.  
박종률(朴鍾律)
창원
유원(由元)의 후손으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박필섭(朴必燮)
사문(師文)의 손자로 문사.부섬.시문에 능하였다.  
박종흥(朴鍾興)
창의(昌議)의 후손으로 경사에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효성이 뛰어났다.  
박인찬(朴璘燦)
태수(*壽)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박상휴(朴相休)
상정(相廷)의 아우로 문필이 뛰어났다.  
박정원(朴煽源)
홍세(弘世)의 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였다.  
박필원(朴必院)
진빈(震彬)의 후손으로 효행이 있었다.  
박채영(朴采瑛)
종률(鍾律)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났다.  
박채기(朴采琪)
홍세(弘世)의 후손으로 기우만(奇宇萬) 문인이며 학문이 풍부하였다.  
박계진(朴桂珍)
예원(禮源)의 아들로 도학에 밝았다.  
박채형(朴采衡)
채겸(采謙)의 아우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박채룡(朴采龍)
홍세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한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였다.  
박민희(朴敏熙)
의엽(宜燁)의 후손으로 효성이 뛰어났다.  
박채성(朴采星)
홍세(弘世)의 후손으로 간재 전우(艮齋 田愚) 문인이였다.  
박준홍(朴準弘)
학준(學準)의 아우로 시례(詩禮)에 밝았다.  
방진호(房鎭浩)
남양
응현(應賢)의 후손으로 기송사장(記誦詞章)에 능통하였다.  
서상규(徐相珪)
달성
홍도(弘度)의 후손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에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손찬조(孫贊祖)
밀양
밀양군 빈(贇)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손정두(孫正斗)
흥종(興宗)의 후손으로 학문이 탁월하였다.  
손재욱(孫在旭)
흥종(興宗)의 후손으로 경전에 밝았다.  
송시웅(宋時雄)
여산
홍장(弘瀁)의 아들로 문학에 뛰어났다.  
송응남(宋應南)
권형(權衡)의 증손으로 학식이 풍부하고 의리에 밝았다.  
송세우(宋世宇)
계정(繼程)의 아들로 사부(詞賦)에 능하였다.  
송광윤(宋光胤)
희손(熙孫)의 현손으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송정광(宋廷光)
운기(雲起)의 후손으로 문예가 뛰어나 예경(禮經)에 밝았다.  
송정보(宋廷寶)
욱(頊)의 손자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가징(宋可徵)
심(諶)의 손자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송 최(宋 *)
두규(斗奎)의 아들로 학문이 풍부하였다.  
송 서(宋 *)
석조(錫祚)의 아들로 학식이 넓었다.  
송정기(宋廷*)
문상(文祥)의 손자로 시례(詩禮)에 밝았다.  
송무징(宋茂徵)
여산
린(律)의 후손으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송태동(宋太東)
만징(萬澄)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재동(宋再東)
만정(萬禎)의 아들로 예학에 밝았다.  
송성빈(宋聖彬)
시(*)의 후손으로 학문이 길고 덕행이 높았다.  
송래은(宋來殷)
명규(明奎)의 후손으로 문학이 섬부하였다.  
송운복(宋運福)
석융(碩隆)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덕용(宋德容)
홍윤(弘胤)의 손자로 문학에 밝았다.  
송일채(宋日彩)
응기(應璣)의 후손으로 학식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내춘(宋來春)
두규(斗奎)의 손자로 문학에 밝았다.  
송지채(宋之采)
재동(再東)의 아들로 학문이 풍부하였다.  
송지상(宋志尙)
지열(志悅)의 아우로 학문이 깊었다.  
송지의(宋志懿)
지열의 아우로 학문이 깊었다.  
송수함(宋壽緘)
일재(日齋)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지풍(宋志*)
정익(廷翼)의 아들로 경례(經禮)에 밝았다.  
송기수(宋基守)
필흥(必興)의 증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인옥(宋仁玉)
여산
두규(斗奎)의 후손으로 문망이 높았다.  
송창호(宋昌昊)
명규(明奎)의 후손으로 문망이 높았다.  
송 환(宋 桓)
심(諶)의 현손으로 성리학에 밝았다.  
송윤상(宋胤相)
사범(師范)의 아들로 문망이 높았다.  
송기일(宋基一)
필원(必遠)의 증손으로 문학이 높았다.  
송지혁(宋志爀)
정열(廷烈)의 아들로 성리학에 밝았다.  
송수권(宋壽權)
지하(支夏)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나 흥양지를 편찬하였다.  
송시형(宋時馨)
계량(繼良)의 후손으로 학식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학룡(宋學龍)
지열(志說)의 아들로 성리학에 밝았다.  
송회상(宋繪相)
사범(師范)의 아들로 학문이 뛰어났다.  
송일신(宋一臣)
질(珞)의 아들로 문학에 밝아 호남절의록을 교정하였다.  
송길상(宋吉相)
사익(師益)의 아들로 성리학에 밝았다.  
송희렴(宋曦濂)
시유(時維)의 5세손으로 문망이 높았다.  
송규상(宋奎祥)
욱(頊)의 후손으로 경사(經史)에 밝았다.  
송석규(宋錫奎)
지수(志樹)의 아들로 경사에 밝았다.  
송원상(宋元相)
여산
사익(師益)의 아들로 문학이 밝았다.  
송석훈(宋錫勳)
환(桓)의 아들로 고금의 사리에 통하였다.  
송석흠(宋碩欽)
기수(基守)의 아들로 학문이 깊었다.  
송사옥(宋師玉)
명규(明奎)의 증손으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송명신(宋明臣)
만(晩)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필환(宋必煥)
득운(得運)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석필(宋錫弼)
지혁(志爀)의 아들로 예학(禮學)에 밝았다.  
송만주(宋萬柱)
결(*)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하상(宋夏相)
길상(吉相)의 아우로 학문이 깊었다.  
송제목(宋濟穆)
익상(翊相)의 아들로 시례(詩禮)에 밝았다.  
송일환(宋日煥)
학린(學麟)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덕환(宋德煥)
운기(雲起)의 후손으로 경사를 섭렵하였다.  
송제행(宋濟行)
익상(翊相)의 아들로 문망이 높았다.  
송복환(宋復煥)
수귀(壽龜)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세환(宋世煥)
수귀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이문(宋以文)
여산
의발(義發)의 6세손으로 성리학에 밝았다.  
송일오(宋日午)
찬문(燦文)의 증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송석겸(宋錫謙)
익상(益商)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송계석(宋啓錫)
상보(商輔)의 손으로 성리학에 밝았다.  
송두환(宋斗煥)
수권(壽權)의 아들로 문행이 저세하였다.  
송민상(宋民相)
이동(以東)의 손자로 경사에 밝았다.  
송진보(宋鎭輔)
문흥(文興)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고 해서(楷書)에 능하였다.  
송진일(宋鎭一)
수귀(壽龜)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진두(宋縝斗)
의발(義發)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송인호(宋寅浩)
일환(日煥)의 아들로 예학에 밝고 글씨가 뛰어났다.  
송진하(宋鎭夏)
석년(錫年)의 아들로 경사에 밝았다.  
송인부(宋仁富)
홍조(洪祚)의 아들로 문장이 세상을 울렸다.  
송양호(宋良浩)
수은(壽殷)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주원(宋柱元)
의발(義發)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송술호(宋術浩)
태동(泰東)의 현손으로 문망이 높았다.  
송박호(宋樸浩)
여산
린(律)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신호(宋愼浩)
운기(雲起)의 후손으로 문사가 뛰어났다.  
송진우(宋鎭宇)
이석(以石)의 아들로 문학이 섬부하였다.  
송재의(宋載義)
형대(亨大)의 후손으로 학식이 고명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진락(宋鎭樂)
석융(碩隆)의 5세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진구(宋鎭久)
사권(思權)의 후손으로 문사(文詞)에 통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진택(宋鎭澤)
설(楔)의 6세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송종호(宋鍾浩)
갑신(甲臣)의 손자로 박학하고 빈민을 구제하였다.  
송기영(宋箕永)
철의 아들로 예학(禮學)에 밝았다.  
송이복(宋以福)
오서(五瑞)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설렵하였다.  
송진상(宋鎭祥)
홍윤(弘允)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영호(宋瑛浩)
응기(應璣)의 후손으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송 즙(宋 楫)
명규(明奎)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철호(宋喆浩)
수귀(壽龜)의 증손으로 문학이 저세하였다.  
송덕호(宋德浩)
오서(五瑞)의 후손으로 문학이 밝았다.  
송주신(宋柱臣)
여산
운기(雲起)의 후손으로 예학에 밝았다.  
송진빈(宋鎭彬)
영환(榮煥)의 아들로 예학에 밝았다.  
송주국(宋柱國)
태동(泰東)의 5세손으로 문학이 비범하였다.  
송주현(宋柱鉉)
질(珞)의 현손으로 문사가 뛰어났다.  
송영호(宋齡浩)
사신(師信)의 증손으로 문학이 밝았다.  
송주훈(宋柱勛)
득운(得運)의 9세손으로 성리학에 밝았다.  
송진영(宋鎭英)
덕건(德建)의 증손으로 문사가 뛰어났다.  
송주익(宋柱益)
순례(純禮)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용호(宋龍浩)
석원(碩源)의 아들이며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송 훈(宋 훈)
명규(明奎)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좌호(宋佐浩)
두환(斗煥)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일호(宋一浩)
진현(鎭賢)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진성(宋鎭成)
시필(時弼)의 후손으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송주현(宋柱賢)
태동(泰東)의 5세손으로 임헌회의 문인이였다.  
송간호(宋幹浩)
사익(師益)의 증손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송린호(宋璘浩)
여산
기의(基義)의 증손으로 문사에 뛰어났다.  
송주록(宋柱祿)
경(逕)의 후손으로 경사에 통하였다.  
송계숙(宋桂璹)
순례(純禮)의 11세손으로 문학이 저세하였다.  
송방호(宋芳浩)
사익(師益)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시호(宋時浩)
시웅(時雄)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송천호(宋天浩)
세환(世煥)의 손자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태섭(宋台燮)
순례(純禮)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주열(宋柱烈)
영(楹)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성호(宋晟浩)
순례(純禮)의 후손으로 성리학에 밝았다.  
송진오(宋鎭五)
수귀(壽龜)의 손자로 사부에 능하였다.  
송계백(宋桂伯)
희렴(曦濂)의 증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영승(宋榮承)
동보(東輔)의 후손으로 문학에 자질이 있었다.  
송신호(宋愼浩)
기명(基明)의 증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기호(宋夔浩)
진하(鎭夏)의 아들로 예학에 밝았다.  
송주표(宋柱表)
진석(鎭碩)의 손자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주무(宋柱武)
여산
인호(寅浩)의 아들로 문망이 높았으나 일찍이 사망하였다.  
송돈호(宋敦浩)
석구(碩耉)의 후손으로 문학이 높았다.  
송년호(宋年浩)
필항(必恒)의 5세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였다.  
송주상(宋柱翔)
기일(基一)의 후손으로 문사가 탁월하였다.  
송주화(宋柱和)
홍원(弘源)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윤호(宋潤浩)
진성(鎭成)의 아들로 문사가 탁월하였다.  
송찬호(宋燦浩)
석겸(錫謙)의 손자로 경례(經禮)에 밝았다.  
송달호(宋達浩)
영길(永吉)의 손자로 경사에 밝았다.  
송영섭(宋英燮)
재의(載義)의 아들로 경사에 밝았다.  
송계욱(宋桂彧)
순례(純禮)의 후손으로 경학에 밝았다.  
송계익(宋桂翼)
석융(碩隆)의 후손으로 문학이 부섬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주정(宋柱精)
홍렬(弘烈)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 홍(宋 泓)
계량(繼良)의 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인섭(宋寅燮)
창형(昌亨)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송계환(宋桂煥)
순호(純浩)의 아들로 문학에 독실하였다.  
송평섭(宋平燮)
여산
영섭(英燮)의 아우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주빈(宋柱撑)
무징(茂徵)의 후손으로 문학에 밝았다.  
송규섭(宋奎燮)
주국(柱國)의 아들로 문학에 밝았다.  
송하주(宋夏柱)
경숙(經淑)의 종질로 문학에 밝았다.  
송익섭(宋益燮)
주민(柱玟)의 아들로 문학에 밝았다.  
송계로(宋桂魯)
수록(壽祿)의 손자로 문학에 밝았다.  
송주종(宋柱鍾)
정악(廷岳)의 후손으로 문망이 높았다.  
송주형(宋柱泂)
오서(五瑞)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송시룡(宋時龍)
중엽(重燁)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송하섭(宋夏燮)
인호(寅浩)의 손자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문인이였다.  
송원길(宋元吉)
덕이(德*)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주순(宋柱詢)
인호(璘浩)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 하였다.  
송주영(宋柱*)
정하(廷夏)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송겸호(宋兼浩)
계량(繼良)의 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였다.  
송계형(宋桂瀅)
석융(碩隆)의 후손으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송용섭(宋鏞燮)
여산
관호(觀浩)의 손자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교유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  
송현섭(宋賢燮)
국흥(國興)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주섭(宋朱燮)
재형(載泂)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기호(宋箕浩)
영환(榮煥)의 손자로 문장이 탁월하였다.  
송 식(宋 植)
기영(箕永)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송승호(宋承浩)
간(侃)의 후손이며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송주철(宋柱喆)
계량(繼良)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주민(宋柱旻)
운기(雲起)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진섭(宋震燮)
낙호(樂浩)의 손자로 시례(詩禮)에 능하였다.  
송흔섭(宋昕燮)
주원(柱愿)의 아들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송정욱(宋井煜)
주화(柱和)의 아들로 의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무료로 환자를 치료해주었다.  
송 호(宋 浩)
남양
인(寅)의 후손으로 문장 행의가 뛰어났다.  
송 찬(宋 찬)
유희(裕喜)의 아들로 문장이 뛰어났다.  
송지경(宋之炅)
유희(裕喜)의 손자로 문행이 저세하였다.  
송도정(宋道貞)
영(瑛)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송석철(宋碩哲)
남양
진남(振南)의 손자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문인이였다.  
송세윤(宋世允)
덕이(德*)의 후손으로 문행이 뛰어나 숙종대 호조참의 (戶曹*議)에 증직되였다.  
송규오(宋奎五)
현익(玄翼)의 아들로 문사(文詞)가 풍부하였다.  
송 흠(宋 欽)
증(增)의 손자로 문장재행이 당대에 뛰어났다.  
송현기(宋賢基)
염(恬)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송양덕(宋陽德)
현(鉉)의 아들로 문장이 당대에 뛰어났다.  
송 일(宋 鎰)
채(埰)의 손자로 문학이 저세하였다.  
송양열(宋陽烈)
일(鎰)의 아들로 문행이 뛰어났다.  
송양길(宋陽吉)
지경(之炅)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양귀(宋陽龜)
급(汲)의 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송인섭(宋仁燮)
도규(道奎)의 증손으로 사부(詞賦)에 능하였다.  
송시창(宋時*)
선(瑄)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고 후진을 교도하였다.  
송시빈(宋時斌)
시일(時一)의 아우로 문필이 뛰어났다.  
송경엽(宋經燁)
영(瑛)의 후손으로 문망이 높아 따르는 학자가 많았다.  
송 의(宋 儀)
채(埰)의 후손으로 시례(詩禮)와 글씨에 뛰어났다.  
송인찬(宋仁燦)
남양
석규(錫奎)의 후손으로 경전(經傳)에 통달하고 글씨가 정밀하였다.  
송 준(宋 俊)
채(埰)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송시옥(宋時玉)
양보(陽輔)의 후손으로 문필이 당대에 유명하였다.  
송문태(宋汶泰)
선(瑄)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여 후진을 교도하였다.  
송철주(宋喆柱)
제(悌)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읽고 후진을 교도하였다.  
송봉주(宋奉柱)
인숙(璘淑)의 조카로 경사를 섭렵하고 필법이 해정하였다.  
송휘주(宋徽柱)
진길(鎭吉)의 손으로 경사를 섭렵하였다.  
송병택(宋秉澤)
상희(相禧)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고 후진을 교훈하였다.  
신명진(申明進)
고령
호참(戶*) 명원(明遠)의 아우로서 문사(文詞)가 풍부하였다.  
신여추(申汝樞)
영해(榮海)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신한지(申漢*)
황(潢)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신한우(申漢佑)
황(潢)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 준(申 濬)
황(潢)의 아우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명재(申命濟)
한주(漢柱)의 아들로 학문이 뛰어났다.  
신명섭(申命涉)
연(演)의 손자로 행의가 독실하였다.  
신명순(申命洵)
고령
한회(漢檜)의 아들로 행의가 뛰어났다.  
신유건(申有建)
경안(景安)의 후손으로 문사 풍부하여 후진을 교도하였다.  
신한극(申漢極)
흡(*)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여 후진을 교도하였다.  
신명효(申命涍)
황(潢)의 손자로 학행이 뛰어났다.  
신명철(申命澈)
여극(汝極)의 증손으로 문행(文行)이 겸비하였다.  
신학모(申學模)
주권(周權)의 손자로 문학이 저세하였다.  
신사택(申師澤)
명섭(命涉)의 둘째 아들로 박학독행(博學篤行)하였다.  
신제택(申濟澤)
명섭(命涉)의 아들로 문예(文藝)가 탁월하였다.  
신장권(申章權)
인후(仁厚)의 후손으로 문예숙취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신명홍(申命泓)
항(沆)의 손자로 문장이 탁월하여 향교중수시 사적비문을 찬하였다.  
신형권(申衡權)
첨정(僉正) 여식(汝拭)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신경득(申景得)
석(碩)의 후손으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신휴록(申休祿)
귀택(龜澤)의 손자로 문행이 있었다.  
신견록(申見祿)
명섭(命涉)의 증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진록(申震祿)
여극(汝極)의 후손으로 문행이 있었다.  
신동록(申東祿)
고령
견록(見祿)의 아우로 문필이 뛰어나 후진을 교도하였다.  
신양권(申良權)
정택(廷澤)의 아들로 경사에 통달하여 후생 교육에 전념하였다.  
신의구(申義求)
석(碩)의 후손으로 성리학을 전공하였다.  
신영모(申永模)
귀택(龜澤)의 증손으로 성리학을 전공하였다.  
신정모(申廷模)
영모의 아우로 문행이 있었다.  
신형모(申馨模)
여식(汝*)의 후손으로 성리학을 전공하였다.  
신귀록(申龜祿)
여식의 후손으로 성리학을 전공하였다.  
신성구(申性求)
영모(永模)의 둘째 아들로 성리학을 탐구하고, 글씨를 잘썼다.  
신찬모(申纘模)
여식의 후손으로 깊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신찬모(申贊模)
백록(白祿)의 아들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신수록(申守祿)
영권(永權)의 아들로 독서를 많이 하여 지식이 해박하고 견문이 많았다.  
신성구(申誠求)
중모(重模)의 아들로서 문학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신용모(申龍模)
봉모(鳳模)의 아우로 문예가 뛰어났다.  
신계록(申桂祿)
양권(良權)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충모(申忠模)
기록(磯祿)의 아들로 문행이 있다.  
신시모(申時模)
고령
여극(汝極)의 후손으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신덕구(申德求)
찬모(贊模)의 아들로 문한(文翰)이 풍부하였다.  
신명구(申蓂求)
치록(致祿)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신용빈(申龍彬)
영모(永模)의 손자로 문학(文學)이 뛰어났다.  
신진구(申鎭求)
기모(祺模)의 아들로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예법에 밝았다.  
신정식(申定植)
여식(汝*)의 후손으로 문예(文藝)가 뛰어났다.  
신승구(申勝求)
인모(仁模)의 아들로 학식이 매우 풍부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신태휴(申台休)
성구(誠求)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정구(申定求)
창권(昌權)의 후손으로 기노사(奇蘆沙) 문인으로 문학이 깊었다.  
신강모(申綱模)
용록(龍祿)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원구(申元求)
기록(磯祿)의 아들로 학식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신경빈(申憬彬)
영모(永模)의 손자로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신준구(申俊求)
영해(榮海)의 후손으로 시례(詩禮)에 능하였다.  
신재구(申在求)
봉모(鳳模)의 아들로 널리 경사에 정통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신윤구(申胤求)
용모(龍模)의 아들로 경사에 통하고 음양학에 능하였다.  
신대휴(申大休)
고령
경구(卿求)의 아들로 경사에 밝고 문행이 당대에 울렸다.  
신중모(申重模)
계량(繼良)의 후손으로 문학이 깊었다.  
신두구(申斗求)
시모(時模)의 아들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신일구(申日求)
학모(學模)의 아들로 문행이 겸비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신철휴(申哲休)
석(碩)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고 예법에 밝았다.  
신창구(申昌求)
여식(汝*)의 후손으로 성리학에 밝고 필법이 뛰어났다.  
신성구(申聲求)
여식(汝*)의 후손으로 기송사(奇松沙)의 문인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상우(申相雨)
여량(汝樑)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문휴(申文休)
여량(汝樑)의 후손으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신백휴(申栢休)
경구(敬求)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성구(申誠求)
여식(汝*)의 후손으로 문행이 겸비하였다.  
신홍구(申弘求)
필모(必模)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응휴(申應休)
영구(英求)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전우(申田雨)
정구(定求)의 손자로 문학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신관우(申琯雨)
하구(河求)의 손자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신양우(申陽雨)
고령
영모(永模)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깊었다.  
신윤우(申潤雨)
여식(汝*)의 후손으로 문사(文詞)가 풍부하였다.  
신준휴(申浚休)
용개(用漑)의 후손으로 정통경전(精通經傳)하고 예학에 밝았다.  
신도구(申燾求)
수록(守祿)의 아들로 경사를 섭렵하고 기노사(奇蘆沙)와 교유하였다.  
신탁구(申卓求)
채모(采模)의 아들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신필구(申弼求)
봉모(鳳模)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두휴(申斗休)
재구(在求)의 아들로 경서(經書)에 통하였다.  
신규환(申圭桓)
영해(榮海)의 후손으로 문학에 밝았다.  
신덕우(申德雨)
용휴(龍休)의 아들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문행이 겸비하였다.  
신봉휴(申鳳休)
산원(汕遠)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신창우(申暢雨)
관우(琯雨)의 아우로 효성이 지극하고 행의가 탁월하였다.  
신희구(申曦求)
중모(重模)의 아들로 문학이 섬부하였다.  
신양우(申良雨)
국휴(國休)의 아들로 일찍이 경사를 섭렵하였다.  
신기우(申琪雨)
석(碩)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배워 아는 것이 많았다.  
신기휴(申基休)
종한(宗漢)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신선우(申善雨)
고령
성구(誠求)의 손자로 경사를 섭렵하였다.  
신현정(申鉉淨)
예균(禮均)의 아들로 성리학에 밝았다.  
신현기(申鉉綺)
종균(鐘均)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신현숙(申鉉淑)
화균(和均)의 아들로 시문과 필법이 뛰어났다.  
신 채(申 彩)
세정(世廷)의 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 소(申 紹)
한광(漢光)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신지호(申智浩)
의목(義穆)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신 환(申 桓)
의수(義秀)의 아들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신 로(申 櫓)
의연(義演)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신종호(申種浩)
의화(義和)의 아들로 문장이 뛰어났다.  
신태균(申太均)
평산
지호(智浩)의 손자로 문학이 풍성하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신대균(申大均)
적희(的熙)의 아들로 문사(文詞)에 뛰어나고 필법이 점묘하였다.  
오태영(吳泰泳)
동복
부필(富弼)의 아들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었으며 문학이 뛰어났다.  
우진옥(禹鎭玉)
단양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후손으로 문사가 탁월하고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우정현(禹庭鉉)
상례(相禮)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유계로(劉桂魯)
강릉
복찬(復贊)의 아들로 학식이 뛰어났다.  
유정열(劉政熱)
병택(秉澤)의 아들로 학식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위계인(魏啓寅)
장흥
대의(大義)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 원(李 元)
흥양
인상(仁祥)의 후손으로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이배(李以培)
희건(希蹇)의 손자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가르쳤다.  
이종한(李宗漢)
귀령(龜齡)의 아들로 문행이 있어 추앙을 받았다.  
이종권(李宗權)
원령(遠齡)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나 추앙을 받았다.  
이시우(李時佑)
종각(宗恪)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나고 행의가 독실하였다.  
이선기(李先基)
시곤(時坤)의 아들로 혼자 성리학을 연구하고, 널리 경전에 통달하여 문학이 섬부하였다.  
이상기(李祥基)
시곤(時坤)의 아들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남규(李南奎)
구령(九齡)의 현손으로 문학이 숙취하였다.  
이시평(李時坪)
갑령(甲齡)의 손자로 학문이 탁월하였다.  
이종수(李鐘洙)
시개(時開)의 후손으로 경사에 주공하여 성리학에 밝았다.  
이백영(李百榮)
백사(白沙) 항복(恒福)의 후손으로 시문(詩文)에 능하여 박사(博士)를 취득하였다.  
이종구(李鐘求)
종원(鐘瑗)의 아우로 학식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종엽(李鐘燁)
흥양
규현(圭賢)의 아들로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수업한 실학가였다.  
이종상(李鐘祥)
규정(圭廷)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났다.  
이근우(李近雨)
종현(鐘弦)의 아들로 경사에 박통하였다.  
이상태(李相兌)
시우(時雨)의 아들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이호규(李灝奎)
재기(在基)의 아들로 예술이 뛰어나고 예학에 밝았다.  
이동신(李東信)
양경공 언(彦)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이기하(李基河)
희안(希顔)의 후손으로 문사(文詞)가 뛰어났다.  
이종익(李鐘益)
신발(新發)의 후손으로 경사에 아주 정통하였다.  
이윤하(李潤夏)
종철(鐘哲)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이희규(李僖奎)
언(堰)의 후손으로 학식이 풍부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성하(李聖河)
규만(奎晩)의 손자로 일찍이 경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필이 뛰어났다.  
이석민(李錫玟)
경주
익곤(益坤)의 아들로 학식이 뛰어났다.  
이규정(李圭正)
진사(進士) 유열(裕烈)의 손자이며 간재(艮齋)의 문인으로 학식이 넓었다.  
이백항(李柏恒)
승우(昇雨)의 아들로 간재 문하에서 수업 학식이 넓었다.  
이지우(李芝雨)
석안(錫安)의 현손으로 경사에 박통하였다.  
이병래(李丙來)
전주
근길(根吉)의 아들로 학문이 깊었다.  
이세원(李世元)
연안
기융(基隆)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이도철(李道哲)
기융의 후손으로 경사에 박통하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이화영(李華寧)
흥구(興九)의 손자로 문사 섬부하였다.  
이교전(李敎箋)
성주
직(稷)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나 배우러오는 자가 많았다.  
임 택(林 *)
부안
정수(挺樹)의 아들로 문학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임 담(林 *)
택(*)의 아우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임 서(林 墅)
담(*)의 아우로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임일하(林一河)
택(*)의 아들로 학문이 뛰어나 후진을 양성하였다.  
임광하(林光河)
경(敬)의 후손으로 학문이 풍부하여 후진을 교도하였다.  
임용하(林龍河)
담(*)의 아들로 문행이 겸비하고 필법이 신묘했다.  
임규하(林奎河)
서(墅)의 아들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임 근(林 槿)
서하(西河) 춘(椿)의 후손으로 문학이 저세(著世)하였다.  
임 표(林 杓)
담(*)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임 백(林 栢)
정수(珽樹)의 증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임 박(林 樸)
부안
춘(椿)의 후손으로 문행이 겸비하여 당대에 유명하였다.  
임일환(林日煥)
영(英)의 후손으로 예학에 밝고 필법이 정묘하였다.  
임기덕(林基德)
일환(日煥)의 아들로 시문에 능하였다.  
임기호(林基鎬)
표(杓)의 손자로 문학이 당대에 울렸다.  
임흥수(林興洙)
나주
서(旅)의 후손으로 시례(詩禮)에 밝고 행의가 있었다.  
장서규(張瑞奎)
후식(後*)의 아들로 경사에 밝고 예악(禮樂)에 능하였다.  
장이익(張以翼)
인동
윤순(允淳)의 후손으로 문학이 저세(著世)하였다.  
장이환(張以煥)
현감 홍(洪)의 후손으로 문학이 저세(著世)하였다.  
장정무(張正武)
동익(東翊)의 아들로 경사에 밝고 문사(文詞)가 뛰어났다.  
장이흥(張以興)
생원(生員) 휘(徽)의 증손으로 시례(詩禮)에 능하고 문행이 뛰어났다.  
장재현(張在弦)
한상(漢相)의 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장필세(張必世)
연(淵)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장진곤(張臻崑)
감찰(監察) 위(渭)의 후손으로 기송사(奇松沙) 문하에서 수학하여 글씨에 능하였다.  
장문옥(張文鈺)
연(淵)의 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전화수(田禾秀)
담양
보인(甫仁)의 아들로 전간재(田艮齋) 문하에서 수업 학식이 뛰어났다.  
정 춘(丁 春)
영광
운희(運熙)의 아들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며 사부(詞賦)에 능하였다.  
정효약(丁孝若)
덕주(德狼)의 아들로 학문과 덕행이 겸비하였다.  
정만현(丁萬鉉)
찰방(察訪) 준(俊)의 9세손으로 경사에 박통하고 서예(書藝)가 뛰어났다.  
정임조(丁任祚)
덕주(德狼)의 손자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정영채(丁永采)
병사(兵使) 걸(傑)의 후손으로 학식이 풍부하였다.  
정진현(丁震鉉)
상준(尙俊)의 후손으로 성리학에 정통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정경수(丁敬洙)
칠현(七賢)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고 예학에 밝아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정자수(丁潢秀)
극인(克仁)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나 후진을 훈도하였다.  
정병용(丁丙鏞)
두옥(斗玉)의 증손으로 문망이 높았다.  
정희수(丁曦秀)
덕주(德狼)의 5세손으로 널리 배워 성리학에 뛰어났다.  
정영엽(丁永燁)
덕주의 현손으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뛰어났다.  
정흥수(丁興秀)
효목(孝穆)의 현손으로 문학이 풍부하였다.  
정낙수(丁珞秀)
승현(昇鉉)의 손자로 기송사(奇松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문망이 높았다.  
정임길(丁壬吉)
상부(尙傅)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정탁수(丁鐸秀)
극인(克仁)의 후손으로 문사(文詞)에 탁월하였다.  
정병채(丁炳彩)
영광
필수(必秀)의 아들로 문망이 높아 후학자가 많았다.  
정하성(丁河成)
상준(尙俊)의 후손으로 문망이 높아 후학자가 많이 따랐다.  
정호현(丁*鉉)
임길(壬吉)의 아들로 학행이 뛰어났다.  
정필세(鄭弼世)
경주
지년(知年)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았다.  
정순중(鄭淳中)
하동
덕현(德鉉)의 아들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정태흠(鄭泰歆)
진주
충장공(忠莊公) 분(*)의 후손으로 경사에 밝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정낙영(鄭落永)
연일
국용(國鎔)의 아들로 많은 책을 섭렵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정신혁(鄭信爀)
진주
분(*)의 후손으로 경사를 널리 섭렵하였다.  
정우영(鄭愚永)
연일
포은몽주(圃隱夢周)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정순보(鄭淳普)
하동
익현(益鉉)의 아들로 시문에 능하였다.  
정두일(鄭斗日)
경주
지년(知年)의 후손으로 학덕이 있었다.  
정국기(鄭局基)
하동
계채(啓采)의 손자로 학덕이 있었다.  
조극인(曺克仁)
창녕
한룡(漢龍)의 후손으로 문학이 섬부하였다.  
조명상(曺命祥)
익방(益昉)의 손자로 학행이 뛰어났다.  
조문제(曺文濟)
함안
어계(漁溪) 족(族)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주남모(朱南模)
신안
문절공(文節公) 열(悅)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주원기(朱源基)
문절공(文節公) 열(悅)의 후손으로 학행이 뛰어났다.  
주상은(朱相殷)
선산(善珊)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밝았다.  
진길범(陳吉範)
여양
무성(武晟)의 후손으로 경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문사(文詞)가 뛰어났다.  
진공범(陳공範)
무성의 후손으로 사부(詞賦)에 능하였다.  
진정두(陳定斗)
성팔(聖八)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진달홍(陳達洪)
무성의 후손으로 사부(詞賦)와 필법이 절묘하였다.  
진석범(陳錫範)
무성의 후손으로 경사에 널리 통달하였다.  
최현철(崔炫喆)
경주
백권(百權)의 아들로 문필이 뛰어났다.  
한찬기(韓纘奇)
청주
문학과 효행이 뛰어났다.  
한세규(韓世逵)
상경(尙敬)의 후손으로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필이 뛰어났다.  
한정석(韓正錫)
응인(應寅)의 후손으로 문학이 뛰어났다.  
한덕봉(韓德鳳)
수(修)의 후손으로 문필이 뛰어났다.  
한인회(韓仁會)
세규(世珪)의 아들로 송연재(宋淵齋)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필이 뛰어났다.  
한대엽(韓大燁)
선회(善會)의 아들로 성리학에 밝았다.  
홍재년(洪在年)
남양
명원(命元)의 후손으로 기노사(奇蘆沙)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식이 풍부하였다.  
홍종헌(洪鐘憲)
주(澍)의 후손으로 기우만 문하에서 수업 하였으며 학문이 해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