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지킴 고흥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 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195인의 인물과 기타 국난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분들을 조사하여 수록한다. 이분들을 충훈, 절의, 의사로 구분하였다.
* 절의(節義)
* 절의(節義)
성 명 |
본관 |
약 사 (略 史) |
거주지 |
고경민(高敬民) |
장흥 |
자(字)는 효백(孝伯)이며 호(號)는 명사(明沙)이다. 통덕랑(通德郞) 사영(士英)의 아들로 부사(府使)를 지냈다. 임진왜란때 영남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후손으로 영대(永大)가 있다. | 풍양 |
고몽춘(高夢春) |
〃 |
자(字)는 봉숙(鳳叔)이며 호(號)는 기봉(奇峰)이다. 부사 경민의 손자로 주부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종조(從祖) 경명(敬命)을 따라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 풍양 |
김영전(金永*) |
경주 |
자(字)는 연부(鍊夫)이며 호(號)는 퇴암(退菴) 또는 송계(松溪)이다. 상촌(桑村) 자수(自粹)의 손자로 세종대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를 역임하고 세종, 문종, 단종의 3조(三朝)를 섬기면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사간원우헌납(司諫院右獻納), 예문관지제교(藝文* 知制敎), 영광군수,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단종이 선위(禪位)하자 과천(果川)의 죽곡(竹谷)으로 돌아가 절개를 지켰다. | 포두 미후 |
김 장(金 장) |
〃 |
처음 이름은 등(登)이다. 자(字)는 결(缺)이며 호(號)는 정헌(靜軒)이다. 자수의 후손으로 세종 계유년(1423) 진사에 급제하고 나이 14세에 문과에 등과(登科)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행강진현감(行康津縣監), 장흥부사, 대사성, 이조참판, 황해관찰사, 예·병·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좌리2등공신(佐理二等功臣)에 녹훈되고 계림군에 봉해졌다. 좌찬성이 증직되고 충숙의 시호가 내려졌다. 후손으로 영섭이 있다. | 포두 미후 |
김 준(金 遵) |
김녕 |
자(字)는 응원(應遠)이며 호(號)는 만지당(晩池堂)이다. 문열공(文烈公) 시흥(時興)의 10세손으로 세종대 등과(登科)하여 벼슬이 대광보국숭록대부돈령부영사(大匡輔國崇祿大夫敦寧府領事)에 이르렀으나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남하하여 과역면 가산 마을에 은둔하고 후에 월악산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단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통곡하며 방상삼년(方喪三年)하였다. | 과역 가산 |
김방제(金邦濟) |
김녕 |
자(字)는 지언(志彦)이며 호(號)는 귀암(龜菴)이다. 백암(白岩) 구정(九鼎)의 현손으로 임진왜란때 숙부 광협(光鋏)을 따라 진주 제석산에서 큰 공을 세웠다. | 도화 |
박 면(朴 勉) |
밀양 |
호(號)는 괴남(槐南)이다. 규정공(糾正公) 현(鉉)의 후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때 손죽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병조참의를 추증하였다. | |
손응호(孫應虎) |
〃 |
자(字)는 관백(寬伯)이며 호(號)는 화암(花菴)이다. 별시위(別侍衛) 세보(世輔)의 손자로 임진왜란때 왕의 서행(西行)을 호가하였다. 그후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계사년(1593) 6월에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 고경명 최경회(崔慶會) 등과 같은날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고 통정대부우부승지(通政大夫右副承旨)에 추증되었다. 고종 을유(乙酉, 1885) 6월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
송 인(宋 寅) |
남양 |
호(號)는 송촌(松村)이다. 남양군(南陽君) 침(琛)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대 진사(進士)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항절불굴한 12현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조선 세종대 문하시중(門下侍中)이 추증되었다. 유림들에 의해 운곡사와 두문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유호(柳浩)가 있다. | 대서 안동 |
송 시(宋 *) |
여산 |
호(號)는 오은(梧隱)이다. 충강공 간(侃)의 아우로서 이성현감(梨城縣監)을 지냈다. 정축년(1457)에 단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북쪽을 보고 통곡하며 방상(方喪)을 3년이나 하였다. | |
송맹유(宋孟儒) |
〃 |
서재 간의 장자로 성균관생원,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를 역임하였다.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흥에 낙향하였다. | |
송중유(宋仲儒) |
여산 |
서재 간의 둘째 아들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종이 손위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단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면서 방상 3년간 하였다. | |
송계유(宋季儒) |
〃 |
간(侃)의 셋째 아들로서 단종이 손위하자 아버지를 모시고 고흥에 들어왔다. | |
송백유(宋伯儒) |
〃 |
간의 넷째 아들로 단종이 손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에서 물러나 고흥에 은둔하였다. | |
송숙유(宋叔儒) |
〃 |
서재 간의 다섯째 아들로 단종이 손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형들과 함께 고흥에 은둔하였다. | |
송홍윤(宋弘允) |
〃 |
현감 백유(伯儒)의 현손으로 정유재란때 의병을 일으키어 중형 홍열과 함께 동복에서 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주부에 제수 되었다. | |
송응기(宋應璣) |
〃 |
첨중추(僉中樞) 응벽(應壁)의 막내 아들로 갑신년에 등과하여 주부로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때 의병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삼척부사에 제수 되었다. | |
송 눌(宋 訥) |
〃 |
호(號)는 궐은(蕨隱)이다. 대립(大立)의 아들로 정유재란때 순절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족숙(族叔) 두남(斗南)을 따라 적을 격멸하여 공을 세우고 군기감을 제수받았다. | |
송지강(宋之綱) |
〃 |
자(字)는 중거(重擧)이다. 부사 두남의 아들로 병자호란때 선전관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 |
송지한(宋之翰) |
〃 |
병사(兵士) 훈(薰)의 아들로 병자호란때 훈련원판관으로 공을 세웠다. | |
송지준(宋之準) |
〃 |
첨정(僉正) 령(*)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훈련원첨정으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 |
송기휴(宋基休) |
〃 |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면호(勉浩)의 증손으로 한말(韓末)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 |
송주헌(宋柱憲) |
여산 |
호(號)는 삼호(三乎)이다. 한천(寒泉) 력(*)의 8세손으로 을묘년(1915)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쟁하고 1919년 유준근, 백관형과 함께 사림(士林) 수천명을 동원하여 순종황제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 |
송유문(宋裕問) |
남양 |
행정(杏亭) 인(寅)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수성장(守城將)으로 본현을 지켰다.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적진에 나아가다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 |
송 염(宋 恬) |
〃 |
참봉 승주(承周)의 아들로 병자년 무과에 합격하여 부사직(副司直)에 임명되었다. 정해년 왜적이 녹도(鹿島)를 침입하자 형과 함께 본현을 수호하였다. | |
송 충(宋 忠) | 승주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한 공이 있어 훈련원판관에 제수 되었다. | ||
송덕린(宋德麟) |
〃 |
승지(承旨) 지(智)의 아들로 신묘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정이 되었다. 계사년에 숙부 제(悌)를 따라 의병을 당진에서 일으키고 진주에서 전공을 세웠다. | |
송덕이(宋德*) |
〃 |
사직(司直) 염(恬)의 아들로 계사년에 종형(從兄) 덕일과 함께 진주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이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 되었다. | |
신인해(申麟海) |
고령 |
자(字)는 덕원(德元)이다. 낙안공(樂安公) 질(珥)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 |
신응송(申應松) |
〃 |
자(字)는 진사(進士)이다. 문경공(文景公) 용개(用漑)의 후손으로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활약하여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 |
신 즙(申 *) |
고령 |
자(字)는 자범(子泛)이다. 오헌(梧軒) 여정(汝楨)의 손자로 병자호란때 백의종군(白衣從軍)하다 굶어죽었다. 관직은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다. | |
오사흥(吳嗣興) |
흥양 |
자(字)는 윤선(潤先)이다. 중권(仲權)의 장자(長子)로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괴산에 은거하였다. 조선 태조가 그에게 이조정랑을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 두원 중대 |
오 유(吳 宥) |
〃 |
문헌공(文獻公) 대승(大陞)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진주에서 순절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
오익창(吳益昌) |
〃 |
자(字)는 성윤(盛潤)이며 호(號)는 사호(沙湖)이다. 영노(寧老)의 아들로 세종대 예괴원(隸槐院)에 들어간 후 예조좌랑, 사헌부장령이 되엇다. 145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영광군수, 광주부윤,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459년 부원수가 되어 북쪽 오랑캐를 섬멸하고 이어 도승지가 되었다. 1460년 길주목사로서 관찰사 신숙주와 함께 오랑캐 모란위지장계를 격퇴하다가 순절하였다. | 두원 중대 |
우창언(禹昌言) | 자(字)는 익배(益戾)이며 호(號)는 송호(松湖)이다.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로 합천군수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로 호가한 공으로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 ||
유 척(柳 滌) |
고흥 |
만호(萬戶) 충열(忠烈)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한산도에서 큰 공을 세워 공조참의 증직이 내려졌다. | |
이득상(李得祥) |
경주 |
초명은 엽(燁)이다. 자(字)는 득운(得運)이며 호(號)는 모효(慕孝)이다. 병조판서(兵曹判書) 원(願)의 아들로 우후(虞侯)를 지냈다. 정유재란때 강항(姜沆), 노인(魯認) 등과 함께 일군에 포로 되었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저항하였다. | |
이방직(李邦稷) |
경주 |
참의(參議) 욱(郁)의 손자로 임진왜란때 당포, 노량진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광해군대 등과하여 훈련원첨정이 되고 병조참의가 증직으로 내려졌다. | |
최대성(崔大成) |
〃 |
자(字)는 대양(大洋)이다. 문정공(文靜公) 해(瀣)의 후손으로 을유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원첨정, 만호에 이르렀다. 정유재란때 큰 공을 세워 형조참의에 제수 되었다. | |
황득영(黃得榮) |
장수 |
익성공(翼成公) 희(喜)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예교(曳橋) 싸움에서 적선을 불태우고 안치, 돌산 등의 전투에서 수명의 적을 살해하였다. | 도화 황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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