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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역사인물

고흥의 역사적 인물(의사)

by 고흥을 찾아서 2013. 11. 4.
충효향인 고흥 고흥군민의 성품은 온유 순진하고 인정이 많으며 의협심이 강하다 고흥은 예로부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구국에 앞장섰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의 충의 의사는 물론 항일 애국지사를 비롯한 반공 애국 충훈 용사 등 수많은 충효열사를 배출한 역사의 고장으로 우리의 가슴마다 그분들의 정신이 숨쉬고 가는 곳마다 그분들의 발자취가 서려있어 충절의 고장이요 선비의 고장이다.

※ 나라지킴 고흥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 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195인의 인물과 기타 국난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분들을 조사하여 수록한다. 이분들을 충훈, 절의, 의사로 구분하였다.

* 의사(義士)
성 명
본관
약 사 (略 史)
거주지
강종문(姜宗文)
진주
자(字)는 일성(日星)이다. 진위장군(振威將軍) 흥진(興震)의 후손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때 공을 세웠다.  
기산도(奇山度)
행주
자(字)는 자인(子仁)이다. 식재(植齋) 재(宰)의 아들로 오적(五賊) 가운데 하나인 이근택을 대궐에서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피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붇잡혀가면서도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실토하지 않았다. 고종이 승하하자 평양립(平壤笠)을 쓰고 생을 마쳤다. 도화
김원봉(金元鳳)
김녕
자(字)는 상지(祥之)이다. 정헌(正憲) 응국(應國)의 아우로, 임진왜란때 정신(挺身)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갔다. 정유재란때에는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다.  
김진희(金晉熙)
김해
자(字)는 숙겸(淑謙)이다. 갑봉(甲峰) 우항(宇抗)의 후손으로 영조(英祖) 무신변(戊申變)에 참전하여 적을 토벌하였다.  
김사빈(金士彬)
김녕
자(字)는 재용(在瑢)이다. 부사 언공(彦恭)의 후손으로 광주학생운동의 대역군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불복하였다. 과역 분천
김삼석(金三錫)
자(字)는 기정(基正)이다. 월파(月波) 추형(秋炯)의 아들로 광주학생운동때 선전원으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저항하다가 투옥되었다.  
도치웅(都致雄)
성주
자(字)는 희중(希中)이다. 판관(判官) 맹삼의 후손으로 영조 무신변에 송팔응을 따라 적을 토벌하였다. 이 공으로 판관에 제수되었다.  
목홍석(睦洪錫)
사천
자(字)는 치숙(致淑)이다. 인범(仁範)의 아들로 기미년(1919) 3·1운동에 가담하여 7년 옥고를 치렀다.  
박지인(朴之仁)
밀양
部將 응사의 아들로 을축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 부장으로 강도(江都)에 들어가 사절신(四節臣)이 순절한 것을 보고 국가의 치욕을 슬퍼하며 자결하였다.  
박정영(朴挺榮)
진원
진원군(珍原君) 희중(熙中)의 9세손으로 장원서별제(掌院署別提)로 재임중 도적 준(儁)의 천권(擅權)과 서적(西賊) 창광(猖狂)을 막았다. 사천현감(泗川縣監)으로 재임중 많은 치적을 남겼다. 후손으로 현주(炫柱)가 있다. 고흥 간천
박중송(朴重松)
호(號)는 상체(常*)이다. 철현(喆炫)의 아들로 갑오 동학농민전쟁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농민군과 싸워 왕조에 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충주가 있다.  
박명현(朴名鉉)
밀양
호(號)는 청계(淸溪)이다. 승환(承煥)의 손자로 을사조약후 면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항거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가혹한 형을 받았으나 끝까지 불복하였다.  
송주흥(宋柱興)
여산
자(字)는 사형(士衡)이다. 간의 후손으로 순종대 무기(戊己)의 난에 안규홍의 막하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송계춘(宋啓春)
자(字)는 화원(華源)이다. 무징(茂徵)의 후손으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였다. 난의 진압후에 분무훈(奮武勳)에 책록되었다.  
송주석(宋柱石)
자(字)는 경문(敬文)이며 호(號)는 묵헌(默軒)이다. 계옥(繼玉)의 증손으로 임·신(壬·申)의 변에 의장으로 발탁되고 청마동비(靑馬東匪)에 소모사(召募使)로 성을 지키며 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송계명(宋桂明)
자(字)는 계안(啓安)이며 호(號)는 가월(柯月)이다. 명규의 후손으로 무신의 변에 김성택(金晟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국치(國恥)를 씻으려다가 일본군에 붙잡혔으나 굴하지 않고 순국하였다.  
송남섭(宋南燮)
자(字)는 화숙(華淑)이며 호(號)는 만오(晩悟)이다. 오서(五瑞)의 후손으로 을사조약(乙巳條約)체결후 의병을 일으켜 김성택과 함께 박곡, 팔영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적을 많이 베어 죽였다.  
신덕성(申德暉)
고령
호(號)는 수암(水巖)이다. 여량의 아들로 갑진년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으로 예교(曳橋)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훈련원봉사에 제수되었다.  
신덕연(申德淵)
자(字)는 군미(君美)이며 호(號)는 율헌(栗軒)이다. 여량의 아들로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그의 공은 공훈록에 기록되었다.  
신명휴(申明休)
자(字)는 성숙(聖淑)이다. 여식(汝拭)의 후손으로 무신년(1908)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었다. 일본에 의해 징역 15년을 언도 받았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신천휴(申千休)
고령
자(字)는 원숙(元淑)이며 호(號)는 금강(琴岡)이다. 영구(永求)의 아들로 3·1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연석(吳然錫)
동복
자(字)는 석주(錫柱)이며 호(號)는 남계(南溪)이다. 중구의 아들로 3.1 운동때 목치숙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복역하였다.  
오창선(吳昌善)
흥양
3·1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뤘다. 출감후 광복군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기여하였다. 이 공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공로포장을 받았다.  
류영휘(柳永暉)
고흥
자(字)는 서일(瑞日)이며 호(號) 안곡(安谷)이다. 송암(松巖) 순(淳)의 후손으로 고종이 승하하자 백립(白笠)으로 여생을 마쳤다.  
류공삼(柳公三)
충서(忠恕)의 후손으로 경술국치(庚戌國恥)후 광복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복역중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류성갑(柳聖甲)
호(號)는 석계(石谿)이다. 화권(化權)의 아들로 안중근의사 사진과 독립선언문 은닉죄로 4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일본대학법문학부 재학시절)제헌의원 헌법기초의원 국민훈장무궁화장 추서하다.
 
이병채(李秉埰)
전주
자(字)는 경휘(敬輝)이며 호(號)는 백남(伯南)이다. 진사(進士) 대진(大進)의 손자로 을사조약(乙巳條約)때 허위(許蔿) 민긍호(閔肯鎬) 김규식(金圭植)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철원, 마전 등에서 많은 일본군을 살해하였다.  
장 걸(張 杰)
인동
충정공(忠正公) 안세(安世)의 후손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