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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고흥칼럼

개천절에 고흥 풍양 팔봉산에서 역사왜곡을 생각하다

by 고흥을 찾아서 2013. 10. 3.

▲팔봉산에서 본 풍양면소재지 전경

지난9월 30일 교학사의 <고교한국사>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최종검정을 통과했으며, 뉴라이트 성향의 집필진들이 편향된 시각에서 역사적 사실을 축소 왜곡시켰다며 비판의 여론이 거세고 오늘도 검정무효운동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오늘은 10월 3일 개천절이다. 우리나라 건국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한 국경일이다. 서기전 2333년,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되었다.

 

하지만 일제와 조선사편수회 실무책임자로 일한 역사학자들에 의해 단군조선 이전의 잃어버린 상고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9200년전 어느날 제천을 드리며 환국을 세웠다는 고흥군 풍양면소재 팔봉산에 올라 생각해본다.

 

사회의 전 분야에 걸쳐서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에 대한 잔재, 곧 친일행위자에 대한 처벌은 고사하고, 그들과 그들의 제자, 후손들이 기득권자로서 사회지도층으로 굳건히 행세하고 있는 시류에만 탓할 것인가?

 

일제는 우리 상고사의 말살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조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미명을 내세워 6년 동안이나 전국의 서적을 색출 압수 하였으며, 수거되어 사라진 서적이 <제헌국회사>에 따르면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조선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조선사편수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이완용, 권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혀놓고 이병도, 신석호, 이종명 등을 실무책임자로 앞세워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우리의 고대역사기록과 전통문화에 관계된 기록을 차입한 사료가 무려 4,950종으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고기록류 3천 576책,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焚書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손을 대어 역사서 왜곡 편찬을 노골적으로 강행 했던 것이다. 

 

<조선사>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20일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금서룡은 1921년 단군고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 모교인 일본 경도제대에 <조선고사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중종7년(1512년)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유사> 정덕본의 <고조선기> 중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국(國)자를 인(因)자로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의 영인본이라하여 배포한 사실을 육당 최남선이 폭로하며 '천인(賤人)의 망필(忘筆)'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환국이 환인으로 바뀌어 신화와 전설속의 인물로 조작함으로써 환웅과 단군을 비롯한 고대사의 뿌리 6000년이 절단된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배를 하기위해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전부 신화로 만들어 조선의 식민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임나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식으로써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기원을 밝힌 개국사 뿐만 아니라 전통사상, 문화관계 서적마저도 모조리 탈취, 소각, 인멸했던 일제는 삼국 이전의 고대 상고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은 사대주의자 김 부식이 쓴 <삼국사기>와 상고역사를 불교적 신화로 각색한 불교인 일연이 쓴 <삼국유사>와 역시 상고사를 신화적으로 묘사한 이승휴의 <제왕운기>등만을 남겨둔 것이다.

 

이렇게 1925~1937년까지 12년간 37권의 '조선사'를 편찬하여 일제치하 조선인에게 조작된 역사만을 가르치고, 그 때 조선사편수회에서 실무책임자로 일한 이병도,신석호씨가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되지 못한 채 정권에 의해 등용되어 식민지 사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한국사대관'을 편찬 하였으며, 이것이 우리 국사교과서의 근간으로 교육됐고 아직도 초,중,고등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그가 죽기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조선일보(1986.10.9일자 1면)에 '삼국 이전의 상고사 기록을 믿어야 한다'며, 민족 앞에 사죄 한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인 교육부 관료들과 관계 사학자들은 기득권 고수를 위해 아직도 민족양심에 배반하는 작태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일제시대 이전에도 많은 전란과 무지의 소치로 귀중한 사료들이 사라진 경우가 많았다. 전부 열거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경우 로 두가지만 보자.

 

첫 번째, 심각한 타격을 받았던 사건으로서,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빼앗겼던 신라의 왜소국 통일 사건이다. 조선이란 국호를 가진 나라가 동방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주나라의 기록(죽서)을 비롯하여 춘추전 국시대의 기록(서경)을 거쳐서 한나라에 이르는 동안 많은 문헌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백제와 고 구려의 몰락 시 당나라군은 상고사 관계서적의 보고였던 서고부터 약탈, 방화, 탈취하여 고 조선등 동이족의 상고시대문화를 소위 춘추필법이라는 역사기록 방식으로 삭제하고, 모두 중국 한족의 문화라고 왜곡하였다.

 

이로 인해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한 이래로의 문헌에서는 조선이란 국호가 사라졌다. 중국 한족의 옛 문헌에서도 볼 수 있는 조선이라는 국호가 당나라가 탈취해 갔다가, 고려 때 김부식에게 전해진 고구려, 백제의 본기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만조선 열전만이 왜곡되어 등장한다.

 

단군조선의 혈통을 지닌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서에 어찌 조선이라는 국호가 없을 수 있는가!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당나라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신라에서 고려에 직접 전해진 신라본기에는 조선이란 국호가 등장한다. 이는 탈취해갔던 고구려와 백제의 본기가 당ㆍ송 시대에 왜 곡, 변조됐음이 드러나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는 단군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시켜야 단군조선의 후계국가인 고구려의 영토를 영원히 차지할 수 있는 명분이 설 수 있고 동이족의 문화, 곧 배달민족의 문화를 중국 한족의 문화로 왜곡,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꼽는다면, 이씨조선의 태종과 세조 등이 사대주의에 빠져있던 성리학파의 뜻에 맞춰, 고구려를 이은 대진(발해)국과 신라, 고려를 통해 그나마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던 고서적들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우는 등 탄압하였던 사건이다.

 

이때에 거두어들이고 불태워진 금서목록을 살펴보면 <고조선비기> <조대기> <표훈천사> <삼성밀기>등 17개 목록으로 대부분이 고조선의 역사와 사상을 기록한 책들로서 이들은 거의 다 현존하는 <한단고기>를 직접적으로 구성하거나 <한단고기>에서 인용되는 책들이다.

 

집권왕조의 정치적 목적과 자신들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교 성리학자들에 의해 귀중한 고서적들이 거의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 스스럼없이 말하며, 또한 스스로 배달민족 또는 한민족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반만년의 역사이며, 왜 배달민족 또는 한민족이라 하는지에 대해 정작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장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기본적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창조적 아이디어가 엄청나게 담겨있는 우리의 고유문화, 고유사상에 관심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 팔봉산 8봉(신선바위)

동양천지가 원시 암흑기였던 태고에 한반도 남단에는 한인의 부족국가가 시작되었다. 이 부족은 9200년전 어느날 고흥 팔봉산에 모여 제천을 드리며 환국을 세웠다. 환국은 3301년간 7대환인이 다스렸으며 고흥에서 한반도 내륙과 해외로 분포되기 시작한 듯하다.

 

5대 환인때 대륙 산동반도와 해외로 나간 후예들이 제천행사에 출입하기 쉽게 군산항과 장항이 있는 부여로 천도한다. 부여에서 약 천년이 지난 환국 말기에 7대 지위리환인의 아들 환웅에게 신시건설을 명하여 천안에 신시를 펼치고 제천을 드렸으며 제천단은 위례산이었고 신시는 위례성이었으며 이후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삼자 온조왕이 백제를 세운 첫 도읍지다.

 

천안신시에서 800년이 지나 제10대 갈고천황은 대륙 황하강이남 태산부근으로 천도하며 배달국이라 칭하고 제14대 치후천황이 황하강 북쪽으로 천도하여 5000년전 대륙황하문명이 시작되었다.

 

18대 환웅이 유웅국공주와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았고 BC2333년에 송화강으로 천도했다. 영토가 넓어 진한, 마한, 번한을 분할통치하며 제47대 2096년간 계승했다. 이렇게 배달겨레(대륙에 갑절로 뻗어나간 겨레), 반만년 배달민족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인 실증주의 반도사관에 아직까지도 물들어 있는 많은 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몇 안 되는 정말로 귀중한 역사서인 <한단고기> <규원사화>등에 대하여 진지한 연구나 실질적인 조사조차도 거부하고 있다.

 

본인들의 기득권 유지만을 위하여 제도권내에서 안주하고 있는 관계사학자들은 남의 나라에서 쓴 역사서는 믿으면서 내 조상이 쓴 민족의 역사서, 배달민족의 뿌리사상과 철학까지 담겨있는 귀중한 역사서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사대주의 식민사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역사의 진실, 특히 상고 역사를 제대로 밝히려면,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 <응제시주>등 우리의 상고역사를 조금이라도 기록에 남긴 자료와 <한단고기> <규원사화> < 단기고사> <부도지> 등 상고사를 다룬 자료를 모아 연구하고, 또한 춘추필법(중국에 이로운 내용 만을 기록하는 방법)으로 역사기록을 했다하나 객관성을 확보하기위하여 중국 측의 사료도 인용 하여야 하며, 그 외에 역사적 사실 증명, 인류학, 고고학, 천문학, 언어학 등 다른 분야의 여러 방면 에서 역사를 제대로 밝히고 민족의 자긍심을 깨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강호제현들의 연구자료들도 함께 탐구 해야한다.

 

우리의 고대사, 상고사에는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예술, 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엄청난 콘텐츠가 담겨있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축구대회 때, 붉은 악마 응원단의 상징인 배달국 제 14 대 한웅, 치우 천황의 깃발아 래 붉은 옷과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우리 가락 엇 3 박자 응원과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전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카오스모스(혼돈 속의 질서) 길거리응원문화, 이런 것이 바로 집단적 무의식으로 우리민족에게 전해져온 우리 것이다.

 

전 세계의 철학자, 종교학자, 과학자들의 초미의 관 심사인 빅 카오스(대 혼돈)를 해결할 수 있는 카오스모스 의식이 우리민족에게는 이미 뿌리 깊이 박혀있고, 그 해결의 씨앗이 우리의 과거에 모두 담겨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과거의 드넓은 영토를 물리적으로 되찾자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영토로서 잊지 말고, 세계를 주도할 큰 정신을 갖자는 것이다. 또한 배달의 역사와 한민족의 정신을 알고 나면 세계의 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이 키워진다.

 

배달민족, 한민족으로서의 주체성을 확립하자는 말은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조화로운 삶을 이루자는 것이다. 배달민족의 고유사상이 바로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하는,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조화의 정신을 근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앞으로의 세계는 경제발전의 정도와 뿌리 있는 정신문화, 즉 깊이 있는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이 세계화를 주도하고 선도 할 것이다.

 

우리의 과거인 배달민족의 역사와 한민족의 정신문화를 확실히 알고 살리면서 자부심을 갖자. 배달 한민족으로서 우리 것을 세계화 하고, 세계의 것을 우리 것으로 하는데 앞장서서, 세계에 자신 있는 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세계화시대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자.

 

- 김영진의 '나도 한마디'

 

Ein Kleines Gluck / Monika Mar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