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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고흥칼럼

3.1절 고흥 독도에서 우리땅 독도와 대마도를 생각하다

by 고흥을 찾아서 2013. 3. 1.

 

 <좌측은 팔도지도(조선시대), 우측은 팔도총도(1530년)>

 

일제 강점기 36년 치욕의 역사를 우리에게 안겨준 일본이 오늘도 독도를 침탈시도를 하고 있다.

 

일본 가시다후미오 외무장관이 지난해에 이어 2년연속 의회 외교연설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지난달 5일 독도 등에 대한 영토주권대책 기획조정실을 내각 내 설치하기로 했다한다.

 

독도는 1500년전인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이사부장군이 삼척에서 출항해 우산국을 복속한 이래 수토활동 등을 통해 관리되고 지켜져온 소중한 우리 땅이다.

 

이는 러일전쟁 당시 마지막 해전도가 실린 1931년 발간 일본 중고등학교 역사지도책 색인란 죽도 아래 조선이라고 기록하며 그들 스스로 자국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조선 말기 관리 이규원의 울릉도 현지 조사보고서인 이규원 일지를 보면 1882년 울릉도 총인구 141명중 전라도출신이 115명이며 이중 흥양(현 전남 고흥)의 3개 섬(죽도·손죽도·거문도) 출신이 61명으로 가장 많았다.

 

독도는 섬 전체가 바위로 이뤄져 있는 탓에 주민들은 돌의 전라도사투리인 ‘독’자를 붙여 ‘독섬’ 또는 ‘석도(石島)'라고 불렀으며, 또 1900년 고종이 반포한 대한제국칙령제41호에는 독도를’석도‘로 표기했다. 1904년 일본의 ’군함신고행동일지‘에 울릉도 주민들이 부르던 이름인 ‘독섬’을 한자로 적은 독도(獨島)라는 명칭을 최초로 기록했다. 

 

실제로도 고흥에는 금산면 오천리 산28번지에 독섬 등으로 불리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바다한가운데 홀로 있다며 독도(獨島)라고 정식이름을 붙인 작은 섬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도 되찾지 못한 땅 대마도가 있다. 1873년 일본인들이 침탈하고 일본해군이 만든 지도부터 대마도의 색깔을 일본본토와 같은 색으로 변조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부산서 49.5km로 일본본토 147.5km보다 100여km가 가깝다. 1861년 일본인 하야시 제작 지도에도 대마도가 조선땅으로 나와 있으며, 1855년 영국의 지도, 1865년 미국지도에도 코리아땅이고 1869년 페리제독의 자서전에도 대한해협은 대마도의 남쪽으로 그려져 있다.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지 3일뒤 이승만대통령은 첫기자회견을 통해 대마도 한국영유권 발언이 있었으며, 9월9일에는 대마도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고, 1949년 1월8일 연두회견에서 포츠담선언에 따라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라며 다시한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이같은 요구는 약탈문화재 반환요구와 함께 한일회담 협상과 맞물리면서 60여 차례나 이어졌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대외정세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대마도 반환문제는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은 결단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선조들이 힘들게 지켜온 소중한 우리땅 지켜내고 찾아야한다. 일본이 독도문제 전담기구를 설치한다면 우리 정부에서도 독도관리 및 대마도 영토주권 회복을 위한 부서의 신설이 요원하다고 본다.

 

 

- 김영진의 '나도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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