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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출신인물

산악인 김홍빈의 희망만들기

by 고흥을 찾아서 2010.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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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빈(47세)은 고흥군 동강면 출신으로 그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봉 14좌를 완등한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66·이탈리아)를 동경해 산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 북미알래스카 매킨리(6,194m)를  단독 등반에 나서 정상 400여 m를 남기고 탈진해 의식을 잃은 뒤 16시간만에 구조됐으며 7번의 수술을 거쳤으나 열손가락을 모두 잃고 등반가의 꿈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고달픈 삶의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름도 팔았고, 골프장공사장에서 굴착기도 몰았습니다. 힘겨운 삶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때 문득 ‘어렵고 힘들 땐 가장 잘하는 것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다시 산에 오르게 되었으며 수년간 무등산과 지리산, 월출산 등을 오르며 손가락 없이 산에 오르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난 후 6년이 지난 1997년 선후배들과 함께 일본 다테야마(3,105m)를 등반하며 다시 자신감을 충전했습니다.

 

 1997년부터 7대륙 최고봉 등정에 나서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를 시작으로 2007년까지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남미 아콩카구아(6,959m) , 아시아 에베레스트(8,848m), l 북미 알래스카의 메킨리(6,194m), 호주 코시어스코(2,228m) 등 6대륙의 최고봉을 차례로 올랐고 2008년 12월 마지막 남은 남극대륙의 빈슨매시프(4,897m) 원정길에 올라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지금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에 도전 중이며, 2006년 가셔브룸Ⅱ와 시샤팡마 남벽, 2007년 에베레스트, 2008년 마칼루,  2009년 5월 다울라기리 등 5개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는 7월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거봉 K2(8,611m)와 10월 안나푸르나(해발 8,091m)를 등정했으나 허리까지 빠지는 눈과 폭풍우 등 기상악화로 하산한 바 있습니다. 

 

현재 2010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원정대장으로 다큐멘터리 PD 등과 함께 3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등반 중에 있습니다.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 완등 도전

 

1. 에베레스트(Everest ) 8,848  네팔/중국 

2. 케이투(K2)  8,611  파키스탄/중국 

3. 캉첸중가(Kangchenjunga) 8,586  네팔/인도 

4. 로체(Lhotse) 8,511  네팔/중국 

*얄룽캉(Yalung Kang)  8,505  네팔

5. 마칼루(Makalu) 8,463  네팔/중국

*로체샤르(Lhotse Shar)  8,400  네팔/중국

6. 초오유(Cho Oyu) 8,201  네팔/중국 

7. 다울라기리(Dhaulagiri)  8,167  네팔

8. 마나슬루(Manaslu)  8,163  네팔 

9.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125  파키스탄 

10. 안나푸르나(Annapurna) 8,091 네팔 

11. 가셔브룸1봉(GasherbrumⅠ) 8,068  파키스탄/중국

12. 브로드피크(Broad Peak) 8,047  파키스탄/중국 

13. 가셔브룸2봉(Gasherbrum Ⅱ) 8,035  파키스탄/중국

14. 시샤팡마(Shisha Pangma)  8,012  중국    

 

14좌는 네팔 정부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9년 히말라야 원정을 개방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1950년 프랑스가 인류 최초로 안나푸르나를 등정했고, 이후 1964년까지 14년 동안 14좌를 먼저 오르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안나푸르나(Annapurna, 8천91m)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군에 있는 세계 10위의 고봉이다. 산스크리스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1950년까지 누구도 탐사한 일이 없어서 지도 상의 공백지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첫 등정 때 사전 정찰 없이 단 한 번의 시도로 정상에 올랐다.

프랑스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성공을 일궈낸 셈이다. 이런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프랑스 원정대의 강력한 팀워크와 최신 장비 덕분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원정대는 모리스 에르조그가 대장을 맡았고 장 쿠지, 루이 라슈날, 리오넬 테레이, 가스통 레뷔파 등 쟁쟁한 산악인으로 구성됐다. 당시 최신 섬유인 나일론으로 만든 텐트와 경금속 소재인 두랄루민으로 만든 장비가 총동원됐다.

이들은 속공전법을 구사해 성공을 일궜다. 하지만 에르조그 대장은 심각한 동상을 입은 탓에 하산 하고 나서 손과 발을 절단해야 했다.

에르조그는 나중에 등정기 '최초의 8천m 안나푸르나'를 펴낸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산악 명저가 된다.

에르조그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에베레스트(Everest, 8천848m)

네팔 히말라야에 속하며 네팔과 티베트 국경의 쿰부 히말라야에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네팔에서는 이 산의 높이를 8천850m로 수정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이 산이 최고봉으로 발견된 지 100년 만에 등정이 이뤄졌다. 1953년 영국의 9차 원정대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가 산악인의 숙원을 풀었다. 영국의 원정은 1921년부터 32년 동안 9차례나 계속됐다.

영국은 1852년 인도를 통치할 때 삼각측량을 통해 이 산이 세계 최고봉임을 발견했다. 티베트에서는 '세계의 여신'이라는 뜻의 '초모룽마(Chomolungma)'라 불리고 네팔에서는 '눈의 여신'이라는 뜻의 '사가르마타(Sagarmatha)'로 통한다.

영국은 측량 활동에 공이 컸던 측지학자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새롭게 이름을 붙였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현지에서는 원래의 이름을 찾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존 헌트 대장은 명저 '악센트 오브 에베레스트(The Ascent of Everest)'를 남겼고, 힐러리는 '나싱 벤처, 나싱 윈(Nothing Venture, Nothing Win)'이라는 등반기를 썼다.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천126m)

국내에는 여성 산악인 고미영 씨가 지난해 7월 하산하다가 실족해 사망한 산으로 잘 알려졌다.

14좌 가운데 9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며 파키스탄 북동부와 인도 사이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 서쪽 끄트머리에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벌거숭이산'이라는 뜻이며, 별칭은 '산의 왕'이라는 의미를 담은 '디아미르(Diamir)'다.

특히 까다로운 루트는 남동쪽의 루팔벽으로 오르는 코스다. 루팔벽은 표고차가 무려 4천500m이며 세계 최장의 암벽으로 악명 높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 때문에 에베레스트 남서벽과 로체 남벽 등과 함께 가장 난도 높은 루트로 꼽힌다. 1953년 헤르만 불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할 때까지 7회에 걸쳐 31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불은 대장의 퇴각 명령을 거부한 채 5캠프에서 표고차 1천220m를 혼자서 17시간 만에 등반해 정상에 섰다. 하지만 하산할 때 산소결핍증 때문에 환각에 시달렸고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선 채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불은 현대적인 보조 기술 도구를 쓰지 않고 정상에 올랐기 때문에 '초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죽음을 넘나들던 이야기는 저서 '8천m의 위와 아래'에 담았다.

고미영 씨는 작년 디아미르 루트로 올라 등정에 성공했다. 이 루트는 편마암으로 구성된 낭가파르밧의 서쪽 디아미르 계곡에서 정상으로 이어진다.

고 씨는 해발 6천200m 지점의 '칼날 능선'에서 실족했다. 보통 하산할 때 산악대원들은 서로 로프에 몸을 묶는데 '칼날 능선'은 눈사태와 낙석이 많아 로프를 사용하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다.

낭가파르밧을 3차례 오른 산악인 엄홍길 씨는 1990년 루팔벽 루트로 등정을 시도했다가 포기했고 1992년에는 디아미르 루트로 정상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정상 부근에서 갑자기 눈이 많이 온 탓에 돌아섰고, 동상에 걸려 엄지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다. 엄 씨는 1999년 디아미르 루트에 다시 도전했고 결국 정상 등반에 성공했다.

◇K2(8천611m)

14좌 가운데 가장 등반이 어려운 산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세 차례에 걸친 도전에도 정상을 허락하지 않다가 1954년 아르디토 데지오 대장이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에 정상을 내준다. 이탈리아 아브루치 공이 등정을 시도한 지 45년 만의 일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첫 등정의 영예를 얻으려고 국고로 막대한 비용을 보조했다. 대규모 원정대는 40여 일의 악전고투 끝에 등정에 성공했다.

산의 특이한 이름은 '카라코람 2호기'라는 측량 기호에서 비롯됐다. 인도 주재 영국 측량국은 1856년 산 높이를 재면서 카라코람의 산들은 편의상 K1, K2, K3 등의 측량 기호를 붙여서 사용했다.

산의 원래 이름은 '초고리(Chogori)'이며 '높고 거대한 산'이라는 뜻이다. '하늘의 절대 군주', '죽음을 부르는 산'으로도 불렸다.

영국인들은 1856년 이 산의 발견자인 공병 장교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몽고메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1861년 산의 접근로를 처음 찾아낸 영국 등산가의 이름을 활용해 '마운드 고드윈 오스틴'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세계 2위의 고봉이라는 간결한 의미와 결합한 'K2'가 널리 사용된다.

◇초오유(Cho Oyu, 8천201m)

티베트어로 '터키옥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보석과 같이 기품이 있고 아름다운 여신이 사는 산이라는 의미다. 네팔 히말라야 쿰부 산군의 서쪽에 자리 잡았다.

오스트리아의 소규모 원정대가 1954년 처음 올랐다. 헤르베르트 티히가 꾸린 검소한 원정대가 1톤 미만의 장비와 물량을 갖고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이들은 7,000m 지점에 4캠프를 설치하고 나서 제트 기류를 만나 1캠프까지 철수하기도 했다. 식량이 부족하고 동상까지 걸렸지만 다시 등정에 나서 정상에 올랐다.

티히의 등정은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포스트 몬순'기에 이뤄졌다.

이 산의 등반사는 다른 고봉에 비해 초라한 편이다. 1952년 영국의 에릭 십튼이 이끈 원정대가 처음 이 산에 도전했으나 다음해에 도전할 에베레스트 등반을 대비하는 시험무대였을 뿐이었다.

◇마칼루(Makalu, 8천463m)

이 산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1년부터다. 영국의 1차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촬영해 온 기록 사진 속의 위용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이 산에 등정하려고 산악인이 몰려든 것은 1954년부터였다. 뉴질랜드, 미국, 프랑스 등 3개국 원정대가 정상 정복을 시도했다.

윌리엄 시리가 이끄는 미국 원정대와 에베레스트 첫 등정의 영웅 힐러리가 이끄는 뉴질랜드 원정대는 온 힘을 다했으나 희생만 안은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 가을에는 프랑코가 이끄는 프랑스 정찰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다음해 봄 원정에 대비해 약 20일동안 주위 6천m급 봉우리 8개와 7천797m의 초모렌초를 등정했다.

다음해인 1955년 프랑코 원정대는 장 꾸지와 리오넬 테레이를 앞세워 3일 연속으로 대원 7명이 모두 등정하는 쾌거를 일궜다. 치밀한 계획, 훌륭한 장비, 우수한 대원, 한 해 전의 사전답사 등을 통한 고소 적응 훈련 덕분이었다.

세계 5위의 산이며 네팔 히말라야 쿰부 산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름은 티베트어로 '마하칼라(Maha-kala)'이며 '큰 기상(氣象)'이라는 뜻이다.

◇칸첸중가(Kangchenjunga, 8천586m)

동부 히말라야의 칸첸중가는 산군의 제왕이다. 네팔, 시킴, 티베트를 잇는 삼각지대에 있다.

남봉(8천491m), 중앙봉(8천475m), 주봉(8천586m), 서봉(8천505m), 동봉(7천903m) 등 5개의 높은 봉으로 이뤄졌다. 5개 봉우리 가운데 4개 봉이 세계 5위의 마칼루보다 더 높다. 티베트어로 '거대한 눈(雪)으로 이뤄진 다섯 개의 보고(寶庫)'라는 뜻이다.

인도의 피서지로 유명한 다질링에서 직선거리로 50㎞ 정도 떨어져 있다. 문명권에서 가까운 산이라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졌다. 에베레스트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봉으로 알려졌다.

처음 답사한 사람은 영국의 알파인 클럽 회장인 프리시필드 더글러스다. 1899년 이 일대를 답사하고 '칸첸중가 일주'라는 답사기를 써서 소개했다.

1905년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 3개국 합동 등반대를 시작으로 영국 등 4개국 합동대, 독일 등반대 등이 계속 도전했으나 실패가 거듭했다. 마침내 1955년 찰스 에반스가 이끄는 영국 등반대가 첫 등정에 성공한다.

등정 첫날 밴드와 브라운에 이어 다음날에는 하디와 스트리더가 정상에 올랐지만 모두 정상에서 몇 발자국 남겨 놓고 발걸음을 멈춘 일화는 유명하다. 신성한 정상을 밟지 않겠다는 주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이 약속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켜졌다.

다만 이 산은 오은선 대장의 2009년 등정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오 대장의 칸첸중가 정상 등정을 증명할만한 사진이 없고, 셰르파들이 오 대장의 정상 정복에 관해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