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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그사진

식민지시대의 가슴아픈역사 소록도갱생원(현 국립소록도병원) 1930년대 풍경

by 고흥을 찾아서 2013. 7. 24.

        구남리 (현 서생리, 남생리 사이) 병사모습, 1934년

        남생리 병사모습, 1934년 

        현 중앙리 중증병사 모습, 1934년 

        신생리 전경, 1934년 

        목장,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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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신사, 1934년 

소록도신사, 1935년 

그물로 고기잡는 모습, 1935년

        환자 작업(빨래)하는 모습, 1935년 

        환자운동회 모습, 1936년

        사은갱생일에 작업나가는 여자,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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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형무소 소록지소, 1936년 

        광주형무소 소록지소 전경, 1937년

        천막생활중인 한센인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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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본관 앞 서관사지대와 신생리마을, 1938년

        동생리 선착 공사작업, 1939년

 

 본 사진에 대한 권리는 고흥문화원 및 사진보유자에게 있으며 무단으로 복제   도용을 금지합니다. 무단사용할 경우 법에 의해 처벌될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한반도의 남쪽 섬 소록도에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으로 100명을 수용하는 한센병 수용시설을 설립했다.

 

조선총독부의 한센병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31년 만주 침략부터다.

 

일본에서 나예방법이 제정되고, 이를 근거로 하여 절대격리 정책과 국립요양소 제도가 실시된 후, 조선에도 이런 방침을 적용하였다.

 

조선나예방령을 제정하여 강제격리를 하면서 소록도를 '국립' 시설로 만들었다. 일반 사회로부터의 차별과 절대적 격리정책은 함께 강화되었다.

 

소록도 갱생원은 3차례에 걸쳐 확장되어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세계 제2위의 규모를 '자랑'하는 대규모 수용시설이 되었지만, 동시에 환자들의 강제노동, 감금, 생체실험, 단종 등이 횡행하고 신앙의 자유도 박탈된 일종의 종신 감옥이 되었다. 

 

그 이후 2003년부터 소록도 한센인 124명을 포함한 448명이 일제의 소록도 강제 격리와 폭력에 항의해 일본 정부의 보상을 청구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2006년부터 한센병 보상법에 따라 일제시대 당시 소록도병원에 수용돼 강제노동이나 단종으로 피해를 본 한센인들에 대해 피해접수를 시작했으며, 

 

2009년 당시 1인당 보상금은 800만엔으로  426명이 보상결정을 받았으나  22명은 관련기록이 미비해 보상결정을 받지 못했고 17명이 대기자로 남았었다.

 

또한 보상결정을 받았던 한센인들도 상당수가 사망해 겨우 10%정도만 실제 보상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941년 수용된 한센인은 6,000명을 넘었으나, 지금은 600여명으로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