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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자료

애국가

by 고흥을 찾아서 2010. 8. 14.

                                

첨부파일 애국가 반주.mp3

 

        

         안익태의 애국가 작곡 배경

    작사자 미상의 우리나라 국가인 애국가의 가사는 윤치호.안창호.민영환 등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것도 공인되지 않았고, 곡은 1936년에 만들어져 1948년 8윌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가로 불리게 되었다.  

       정부에 의하여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거나 채택된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작곡자가 <애국가>의 가사를 처음 접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였고, 그 뒤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Auld lang syne>, 즉 <이별의 노래>의 곡조에 붙여 불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한국사람인 자기가 직접 작곡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36년에 곡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선수단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불렀는데, 우리나라의 <애국가>가 불린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다. 
      곡은 가장조(또는 사장조), 4분의 4박자로 되어 있으며,  속도는 느리고 장중한 분위기의 악상을 가지고 있다.  모두 16마디로 되어 있으며,  4절의 가사로 된 유절형식과 a-b-c-d의 구조로 된 가요 두도막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것이 특징인 <애국가>는 사용 용도에 따라 세가지로 구분된다.  피아노 반주로 된 것이 원곡이고,  아무런 반주 없이 부르는 것과 악기만으로 연주되는 것이 있다.  반주가 있는경우에는 4마디의 전주가 있고,  악기만으로 연주되는 경우에는 전주가 없다.  
    작곡자는 이 <애국가>를 주제로 하여 1936년 자신의 대표작인 교향곡 <한국환상곡>을 작곡하였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安益泰)<1906.12.5∼1965.9.16>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는 한편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제1첼로 주자로 활약하였다. 그 무렵 스토코프스키와 교분을 맺었으며 필라델피아의 카네기리사이틀홀 등에서 독주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 

      34년 헝가리로 건너가 도야니에게 작곡을 배우며 민족주의정신과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빈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주로 지휘법을 사사하고 36년에는 몇년 전 미국에서부터 착상해 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
     40년까지 슈트라우스의 보조지휘자로 있다가 그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독자적 지휘활동를 하고 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에스파냐 여인과 결혼, 에스파냐 국적을 얻고 마드리드 마욜카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영국·이탈리아·미국 등의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하였다.
    57년 귀국하여 자작곡 <강천성악(降天聖樂)> <한국환상곡> 등을 지휘하고 61년 다시 귀국하여 국제 음악제를 개최토록 하였으며 63년까지 3회에 걸쳐 주관하였다. 

      후기낭만파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자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작품을 즐겨 지휘했다.
    65년 에스파냐에서 병사. 57년 문화포상을 받았으며 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애국가> <한국 환상곡> <강천성악> <애! 강산의 의기논개> <애국선열추도곡>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