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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성지고흥

고흥을 빛낸 호국인물들

by 고흥을 찾아서 2010. 4. 29.

고흥을 빛낸 호국인물들

성 명
본관
약 사 (略 史)
거주지
강언호(姜彦浩)
진주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손자로 임진왜란때 예교(曳橋)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워 판관(判官)에 제수되고 선무훈(宣武勳)에 기록되었다.  
김구룡(金九龍)
김녕
자(字)는 회운(會雲)이며 호(號)는 봉계(鳳溪)이다. 지평(持平) 원경(元慶)의 아들로서 이조좌랑(吏曹佐郞),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이시애난(李施愛亂)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봉되었다. 후손으로 기보(基輔)가 있다. 과역 가산
김 규(金 圭)
침묘령(寢廟令)을 지낸 구정(九鼎)의 아들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풍양 송정
김광협(金光鋏)
자(字)는 자서(子瑞)이며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1561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고금도(古今島)에서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고 선무훈(宣武勳)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기순(基舜)이 있다. 풍양 송정
김언량(金彦良)
자(字)는 국한(國翰)이며 호(號)는 모의재(慕毅齋)이다. 첨정(僉正) 상걸(商傑)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때 영천, 진주, 한산, 고금도 등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영채(永采)가 있다. 과역 가산
김언공(金彦恭)
자(字)는 효칙(孝則)이며 호(號)는 묵재(默齋)이다. 언량의 아우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고령진병마절제사(高嶺鎭兵馬節制使)로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扈駕)한 공으로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제수되었고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영천(永川)에서 왜적을 토벌하였다. 정유재란때 의병 4백인을 거느리고 진주에서 크게 공을 세워 순천도호부사겸조방장(順天都護府使兼助防將)에 제수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절충장군첨지충주부사겸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으로 승진하였다. 순조 계사년(1833) 나주 충장사(忠壯祠)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영철(永哲)이 있다.  
김유제(金有濟)
김녕
자(字)는 관윤(寬允)이다. 우통례(右通禮)를 지낸 은준(殷俊)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형 유흡, 유협과 함께 권율원수 막하에 들어가 많은 왜적의 목을 베었다. 정유재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당포, 노량진 등의 전투에서 누차 전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병규(炳奎)가 있다. 도화 청룡
김복달(金福達)
언공의 아들로 159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부장 겸 훈련원첨정을 역임하고 정유재란 때에는 진주에서 전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복빈(福彬)이 있다. 과역 외백
김응춘(金應春)
자(字)는 이생(而生)이며 호(號)는 문선(文善)이다. 준(遵)의 후손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때 진주, 한산도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랑(宣武郞)을 제수받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증직으로 내려졌다. 후손으로 기보(基輔)가 있다. 경남 하동
김응국(金應國)
준의 후손인 일보(日輔)의 아들로서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주부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당포, 한산, 명량 등의 전투에서 적선 수척을 부수고 진주에서 왜적 수백명을 소탕한 공으로 판관(判官)에 제수 되었다. 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후손으로 공석(公錫)이 있다. 풍양면
김평세(金平世)
준의 후손으로 자(字)는 제경(濟卿)이다. 선조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삼종숙 언공과 함께 한산, 고금도 등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워 훈련원 첨정에 오르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영태(永台)가 있다. 고흥 고소
김유흡(金有洽)
김녕
자(字)는 방윤(方潤)이며 호(號)는 죽계(竹溪)이다. 은준의 아들로 전옥서 주부(典獄暑主簿)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덕린(德麟), 덕봉(德鳳), 덕방(德邦) 등과 더불어 최대성(崔大成)과 합세하여 첨산 망저포에서 왜적과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차자 덕봉과 함께 순절하였다. 후손으로 주빈이 있다. 과역 가산
김은세(金銀世)
자(字)는 이원(利元)이며 호(號)는 흥암(興岩)이다. 정유재란 때 수문장으로 호남 의사(義士)와 더불어 고금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광양 옥룡
김덕룡(金德龍)
다른 이름은 덕용(德容)이다. 유협의 아들로 훈련원주부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3형제가 권율원수 막하에 들어가 영천에서 왜적을 토벌하였다. 정유재란때에는 송대립(宋大立), 황원복(黃元福), 전방삭(全方朔) 등과 함께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왜적 수십명을 목베고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창환(昌煥)이 있다. 도화 청룡
김덕린(金德麟)
자(字)는 인경(仁卿)이며 호(號)는 운암(雲岩)이다. 유흡의 아들로 중훈대부전옥서주부(中訓大夫典獄暑主簿)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유흡이 노량진 전투에서 사망하자 시신을 반장하고 다시 참전하여 수십명의 왜적을 목베었다. 후손으로 주빈(炷彬)이 있다. 가역 가산
김덕인(金德仁)
자(字)는 현경(顯敬)이다. 유습의 아들로 정유재란때 참전하여 순절하니 통훈대부중추부사로 추증되었다. 후손으로 영복(永福)이 있다. 점암 오리
김덕방(金德邦)
김녕
자(字)는 백언(伯彦)이다. 유흡의 아들로 선조대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호군(龍槐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훈련원 부장으로 충무공 이순신 막하에 들어가 크게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는 당포, 노량진 전투에서 왜선 수십척을 불태우고 전사하였다. 후손으로 일진(一珍)이 있다. 포두 미후
김유남(金有男)
자(字)는 양준(良俊)이다. 판관(判官) 양(樑)의 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때 참전하여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영우(永雨)가 있다.  
김기남(金起南)
자(字)는 숙보(淑寶)이며 호(號)는 석정(石亭)이다, 덕검(德儉)의 아들로 군자감참봉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부사 언공을 따라 진주, 한산등 전투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또 섬진, 고금도 등 전투에서 왜선 수십척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제수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종빈(鍾彬)이 있다. 과역 석촌
김준영(金俊榮)
자(字)는 태진(泰晉)이다. 관조 시흥(時興)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고 여러 차례 방어책을 펴 많은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으며 부조묘(不*廟)에 모셔졌다. 후손으로 규용(圭鏞)이 있다. 충남 논산
김몽룡(金夢龍)
자(字)는 직채(直彩)이며 호(號)는 삼봉(三峯)이다. 광협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아버지와 함께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해미현감(海美縣監)에 제수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9대손으로 기봉(基逢)이 있다.  
김덕봉(金德鳳)
자(字)는 인서(仁瑞)이다. 유흡의 둘째 아들로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였다. 1596년 아버지 유흡과 최대성을 따라 노량진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부자가 함께 순절하였다. 과역 가산
김경립(金慶立)
김녕
자(字)는 신백(信伯)이며 호(號)는 전사옹(田舍翁)이다. 준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진주, 울산 등의 전투에서 누차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증직되었다. 후손으로 일신(日新)이 있다. 풍양 한서
김여효(金汝孝)
자(字)는 이순(而舜)이다. 준의 후손으로 1621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으로 병자호란때 선봉장이 되어 격렬하게 많은 적을 참살하였다. 그 공으로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일신이 있다. 풍양 한동
김상현(金商鉉)
자(字)는 중삼(重三)이며 호(號)는 동백정(東栢亭)이다. 준의 후손으로 숙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과(司果)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고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지냈다. 보사일등훈(保社一等勳)에 녹훈되었다. 후손으로 영도(永道)가 있다. 두원 신흥
김몽개(金夢凱)
자(字)는 직승(直承)이다. 광협의 아들로 일찍이 무과에 올라 부사과(副司果), 조산만호(造山萬戶), 연일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누차 전공을 세웠으므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옥채(玉采)가 있다. 점암 용두
김몽표(金夢彪)
자(字)는 직문(直文)이며 호(號)는 남재(嵐齋)이다. 광협의 아들로 선조때 무과로 진출하여 조산대부사복시정(朝散大夫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3형제가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노량, 한산도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옥채(玉采)가 있다.
김우정(金禹鼎)
김녕
자(字)는 여기(汝起)이다. 준의 후손으로 숙종대 무과에 올라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 선전관(宣傳官), 어모장군(禦侮將軍),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가선대부(嘉善大夫) 병마사(兵馬使) 등을 역임하였다.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덕용(德勇)이 있다. 남양 대곡
김창한(金昌漢)
경주
초명이 수복(水福)이다. 자(字)는 충여(忠汝)이며 호(號)는 성재(誠齋)이다. 위성(緯星)의 아들로 선공감정(繕工監正),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창의(倡義)하여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안성전투(安城戰鬪)에서 적 수십명을 참하고 순절하였다. 선조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고 좌승지에 추증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그 공이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덕섭(德燮)이 있다. 두원 대덕
김대춘(金大春)
자(字)는 화숙(和淑)이다. 능천(能天)의 아들로 무과에 올라 훈련원정을 제수받고, 임진왜란때 송덕일과 협력하여 의주에서 왜적을 격퇴하였다. 정유재란때에는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송희립(宋希立)과 더불어 명량(鳴梁)해전에서 적을 격멸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규환(圭桓)이 있다. 남양 망주
김붕만(金鵬萬)
김해
자(字)는 봉서(鳳瑞)이다. 영진(永珍)의 후손으로 무과에 진출하여 정유재란때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누차 공을 세우고 한산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진석(鎭碩)이 있다. 두원 예회
김 황(金 璜)
김해
문간공(文簡公) 저(著)의 후손으로 관직이 판관(判官) 병조참판,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계사(癸巳, 1593)년에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진석(鎭碩)이 있다. 두원 예회
맹계원(孟季元)
신창
문간공(文簡公) 사성(思誠)의 후손으로 사역원정(司譯院正)을 역임하였다. 이순신장군 막하에 나아가 노량, 당포, 좌수영 등의 전투에서 여려 차례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후손으로 정환(井煥)이 있다. 남양 망주
노윤발(盧潤發)
광산
자(字)는 시화(是華)이다. 대방(大邦)의 아들로 1585년 무과에 올라 주부로서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당포, 노량진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전사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후손으로 한섭(漢燮)이 있다. 포두 외초
도맹삼(都孟三)
성주
자(字)는 효지(孝之)이다. 한림공의 후손으로 일찍이 무과에 올라 판관을 역임하였다. 포두 상포
류청신(柳淸臣)
고흥
상세한 것은 상신(相臣)편 참조.  
류 탁(柳 濯)
청신의 손자. 상세한 것은 상신(相臣)편 참조.  
류 습(柳 濕)
탁의 아들로 15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과의장군상호군(果毅將軍上護軍)을 제수받았다. 태종대에 가선대부 예조, 병조, 형조, 이조판서를 거쳤다. 태종 경진년(庚辰年, 1400) 좌명훈(佐命勳)에 녹훈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405)에 전라도 안무사(全羅道按撫使)로 출사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408)에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고 세종 기해년(己亥年 1419) 우군원수로서 벼슬을 마쳤다. 그후 20년동안 조정사(朝廷事)를 말하지 않다가 별세하였다. 조정에서는 철조치제(撤朝致祭)하고 양정(襄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8대손으로 제천(濟川)이 있다. 두원 중대
류충신(柳忠信)
고흥
자(字)는 성중(誠中)이다. 탁의 현손이다. 음직(蔭職)으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을 보직 받고 부사직(副司直), 중직대부건공장군(中直大夫建功將軍)으로 전직하였다. 경오년 무과에 올라 외직(外職)으로 매도만호(梅島萬戶), 내직으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형제, 숙부와 조카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왜적과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고흥 운곡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중혁(重爀)이 있다. 고승 호동
류충서(柳忠恕)
자(字)는 추중(推中)이다. 탁의 현손으로 선조대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아들과 조카 등 10여인을 거느리고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그후 권율장군 막하에 들어가 행주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이에 참판(參判)을 증직으로 받았다. 선무원종 2등훈에 녹훈되었다. 후손으로 정석(正錫)이 있다. 고흥 간천
류 간(柳 澗)
자(字)는 거경(巨卿)이며 호(號)는 노천(老泉)이다. 청신의 후손으로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우판관 계(溪)와 한께 많은 지략을 펴 누차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 1등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원현(元鉉)이 있다. 순천
류 순(柳 淳)
자(字)는 호숙(顥淑)이며 호(號)는 송암(松菴)이다. 충례(忠禮)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계부 충서, 삼종형 온(溫)과 더불어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그후 권율장군 막하에 들어가 왜적 수십명의 목을 베었다. 또 삼종숙 몽사(夢獅)와 더불어 군량 10여만석을 선천(宣川) 에 수송하였다. 이에 조종에서는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를 제수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영석(英錫)이 있다. 고흥 호서
류 기(柳 淇)
고흥
자(字)는 여정(汝挺)이다. 주부 문(汶)의 손자로 1584년 무과에 올라 훈련원판관을 제수받고 임진왜란때 신천군수로 재임중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누차 전공을 세웠다. 또 권율장군휘하에서도 활약하여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제수 받았다. 후손으로 홍근(洪根)이 있다. 고흥 호산
류의신(柳義臣)
자(字)는 언정(彦正)이다. 1583년 무과에 올라 이진권관(梨津權官)을 제수받았다. 임진왜란때 가덕포(加德浦) 앞 바다에서 많은 적을 물리치고 크게 이기니 훈련원첨정에 제수되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호조참의의 증직을 받았다. 후손으로 중팔이 있다. 고흥 호산
류 순(柳 洵)
호택(好澤)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부장(部將)으로 의병을 일으켜 권율장군 막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므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중팔(重八)이 있다. 동강 당곡
류 징(柳 澄)
자(字)는 내원(乃源)이며 호(號)는 호암(虎庵)이다. 충서(忠恕)의 아들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사촌 순, 황, 계. 재종 척, 온과 더불어 맹세하고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수십명의 적의 목을 베고 또 섬진, 고금도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정석(正錫)이 있다. 고흥 간천
류득춘(柳得春)
청신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고 수륙전에서 공을 세웠다. 이에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제수받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선석(善錫)이 있다. 영남 간천
류 황(柳 滉)
자(字)는 중달(仲達)이다. 임진왜란때 부장으로 숙부 충서, 친척 등 10여인과 함께 권율장군 막하에 들어가 누차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류 계(柳 溪)
고흥
자(字)는 거용(擧用)이다. 탁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제주판관으로 친척 10여인과 더불어 계부 충서를 따라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그후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평근(平根)이 있다. 두원 금성
류희룡(柳希龍)
자(字)는 운흥(雲興)이며 호(號)는 영호(瀛湖)이다. 첨정 일(溢)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에 제수되었다. 후손으로 경진(敬鎭)이 있다. 고흥 호동
류 강(柳 江)
탁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채민(埰玟)이 있다. 두원 신송
류 척(柳 滌)
양정공(襄靖公) 습(濕)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임영(林英) 군수와 더불어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한산도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을 보여주었으나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금산 대첩단 운곡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중필(重弼)이 있다. 풍양 야막
박리수(朴鯉壽)
창원
호(號)는 추산(秋山)이다. 유원(有元)의 증손으로 임진왜란 때 굶주린 병사를 위하여 면포와 식량을 제공하였다. 그후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에 제수되었다. 왕을 의주로 호가한 후 왜적과 싸워 수십명의 목을 베고 전사하였다. 선조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용강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채희(采禧)가 있다. 대서 하남
박홍세(朴弘世)
자(字)는 여회(汝恢)이며 호(號)는 남정이다. 양정공(襄靖公) 령(齡)의 후손으로 정유재란때 의병을 모집하여 금갑도(金甲島)에서 왜적을 맞아 백여명을 참수하였다.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용강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채식(采植)이 있다. 대서 금곡
박정엽(朴正燁)
창원
자(字)는 이질(而質)이며 호(號)는 석담(石潭)이다. 홍세의 아들로 정유재란때 아우 의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백여명의 적의 목을 베었다. 또 아버지 찬성공과 함께 순천 예교(曳橋)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훈련원주부에 제수되었다. 통정대부가 더해졌다. 후손으로 정환(正煥)이 있다. 동강 마륜
박의엽(朴宜燁)
호(號)는 송유이다. 좌찬성 홍세의 아들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때 금갑도(金甲島)를 수호하고 보성전투에서 많은 왜적을 참수 하였다. 순천 예교전투에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지 3일만에 아버지 찬성공이 순절하니 시체를 거두어 고향에 안장했다. 특별히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다. 후손으로 기형(基炯)이 있다.
박응오(朴應鰲)
자(字)는 중첨(重瞻)이다. 판관 대련(大連)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정유재란때는 여러차례 공을 세워 훈련원 판관에 제수되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재원(在源)이 있다. 대서 축동
박이화(朴而華)
임진왜란때 숙부 응오 및 종제 이장(而章)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그후 여러번 공을 세워 사복시정에 제수되었다. 또 호조참의의 증직이 내려졌다. 후손으로 미진(米珍)이 있다. 대서 축동
박이장(朴而章)
창원
이화의 아우로 부령부사를 역임하였다. 정해년에 송지(宋智)와 함께 향병을 모집하여 적을 방어하였다. 백미 수백석을 방출하여 군량에 충당하였다. 임진왜란때에는 왕을 의주로 호가한 공으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종대(鍾大)가 있다. 대서 축동
박은춘(朴殷春)
밀양
자(字)는 명화(命和)이며 호(號)는 동계(東溪)이다. 참의 중유(仲*)의 손자로 무과에 올라 임진왜란때 진주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때 공을 세워 인동부사(仁同府使)를 제수받았다. 노량진에서 전사하니 선무원종훈에 녹훈되고 호조참의에 추중되었다. 후손으로 양주(良柱)가 있다. 두원 두곡
박응사(朴應士)
효공공(孝恭公) 중손(仲孫)의 후손으로 기축년에 등과하여 임진왜란때 부장으로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박응수(朴應秀)
부사 은춘의 아들로써 부산첨사를 역임하고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워 훈련원 판관을 제수받고 선무원종훈에 녹훈되었다. 후손으로 홍규(洪圭)가 있다. 두원 두곡
박기남(朴奇南)
참의 문원(*元)의 후손으로 훈련원판관을 역임하고 임진왜란때 왕의 몽진(蒙塵)을 호종하였다. 그후 왜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하여 울산전투에 참여하여 기민한 방략으로 승리하였다. 남해현령에 제수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박만수(朴萬壽)
난계 연(堧)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가리첨사(加里僉使)로 있으면서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명량전투에 참전하여 순절하였다.  
박계추(朴戒秋)
자(字)는 춘경(春卿)이다. 만수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아버지를 따라 충무공 막하에 들어가 명량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부자가 함께 순절하였다.  
박 란(朴 蘭)
규정공(糾正公) 현(鉉)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한산도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녹동 쌍충사에 사적비가 세워졌다.  
박천세(朴天世)
밀양
자(字)는 보천(輔天)이다. 현감 계춘(季春)의 손자로 선조대 무과에 올라 주부를 역임하였다. 정유재란때 향병을 모집하여 노량진에서 적선을 크게 부순 공으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박인어(朴忍魚)
참의를 지낸 미(楣)의 5세손으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정유재란때 노량진, 고금도 등의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주부에 제수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박인침(朴仁琛)
자(字)는 정보이다. 훈정 기남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집하여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갑오년에 무과에 올라 훈련원주부가 되고 얼마 후 가산군수로 승진되었으며 선무원종훈에 녹훈되었다.  
배이형(裵已亨)
성산
자(字)는 통고(通告)이다. 양호공(襄胡公) 맹달(孟達)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의 직이 더하여졌다. 후손으로 계춘(桂春)이 있다. 두원 성두
배응록(裵應祿)
자(字)는 시원(始遠)이며 호(號)는 송운(松雲)이다. 성산군(星山君) 천룡(天龍)의 후손으로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士) 김천일(金千鎰) 막하에서 역전고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가영(可永)이 있다. 동강 청송
서몽문(徐夢文)
이천
자(字)는 중명(重明)이며 호(號)는 만화(萬化)이다. 장위공(章威公) 희(熙)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종형 일남(馹南)과 함께 진주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누차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선선립(宣善立)
보성
이조 판서(吏曹判書) 형(炯)의 후손으로 임오년에 등과하여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한산전투에서 수십명의 왜적을 참수하고 야간에 돌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송 간(宋 侃)
여산
호(號)는 서재이다. 정열공 송례(宋禮)의 7세손으로 세종, 문종, 단종의 3대를 섬겼다. 관직이 형조참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후손으로 17대손인 기하(基河)가 있다. 동강 대강
송순례(宋純禮)
충강공 간의 현손으로 병인년에 등과하여 전주진병마절제도위(全州鎭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하였다. 선조 계미년(癸未年, 1583)에 심호추장(瀋胡酋長) 우을지내(于乙只乃)를 사살하였다. 또 그해에 율남니양(栗南尼陽)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15대손인 기오(基五)가 있다. 대서 상남
송 전(宋 烹)
순형(純衡)의 아들로 임진왜란시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으로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광양현감에 제수되었다. 후손으로 동기(東圻)가 있다. 두원 송정
송응벽(宋應壁)
현감(縣監) 순의(純義)의 아들로 만호(萬戶)를 지냈다.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 3등훈에 녹훈되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후손으로 근섭(槿燮)이 있다. 승주 별량
송 령(宋 *)
자(字)는 경함이다. 주부 수형(粹衡)의 아들로 첨정으로서 임진왜란때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용섭(龍燮)이 있다. 동강 평촌
송응민(宋應珉)
순의(純義)의 아들로 만호를 지냈다. 임진왜란때 노량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태화(泰和)가 있다. 대서 상남
송 성(宋 晟)
여산
자(字)는 명수(明未)이다. 충강공 간의 5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부산전투에서 적장의 목을 벤 공으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태화(泰和)가 있다.  
송두남(宋斗南)
자(字)는 경정(景挺)이다. 순형의 둘째 아들로 병자년에 등과하여 임진년에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출사하였다.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뒤 회령, 종성에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유애비가 있다. 후손으로 판섭(判燮)이 있다. 대서 상남
송오서(宋五瑞)
충강공 간의 5세손으로 무과에 올라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송한련(宋漢連)
충강공 간의 손자로 부장(部將)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적선을 파괴하고 불태운 공으로 판관에 제수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기욱(基旭)이 있다. 점암 서정
송홍득(宋弘得)
충강공 간의 후손으로 무과에 올라 첨정(僉正)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훈련원부정으로서 공을 세워 선무훈에 기록되었다. 12세손으로 기정(基禎)이 있다. 점암 봉남
송홍열(宋弘烈)
충강공 간의 5세손으로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단성현감(丹城縣監), 제주판관(濟州判官), 경상수군우후(慶尙水軍虞侯) 등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때 창의(倡義) 부장으로서 동복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이 공으로 평해군수에 제수되었다. 후손으로 기정(基禎)이 있다.  
송대립(宋大立)
관(寬)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첨산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갑오년에 무과에 올라 훈련원정이 되었다. 정유재란때에는 보성 예진(曳津)에서 크게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숙종 갑신(1704)에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정조 을사년(정조 9년, 1785)에 고흥 운곡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기하(基河)가 있다. 동강 대강
송희립(宋希立)
여산
대립의 아우로 훈련원첨정을 역임하였다. 노량진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전고투 하였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전라좌수사에 제수되었다. 순조 병신년(丙申年) 세충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영섭(永燮)이 있다. 도화
송 건(宋 建)
자(字)는 사립(士立)이다. 현령(縣令) 필형(弼衡)의 아들로 무자년에 등과하였다. 임진왜란때 훈련원주부로서 영남전투에서 승전하여 통군별장(統軍別將)에 발탁되어 함창전투에 참가하여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제동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수봉(洙奉)이 있다. 동강 마륜
송 백(宋 栢)
충강공 간의 6세손으로 좌부장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주부로서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기섭(璣燮)이 있다. 남양 부도
송 훈(宋 薰)
주부(主簿) 수형(粹衡)의 둘째 아들로 울산병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주부로서 큰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송계현(宋繼賢)
자(字)는 사성(嗣聖)이다. 첨정(僉正) 해(邂)의 큰 아들로 군자감참봉을 지냈다. 임진왜란때 형제와 일가 친척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정유왜란때에는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명량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계진(桂鎭)이 있다. 동강 원동
송세발(宋世潑)
충의위(忠義衛) 굉(宏)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우부장에 제수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정종(貞鍾)이 있다. 점암 신안
송 산(宋 珊)
여산
자(字)는 군옥(君玉)이며 호(號)는 담암(澹菴)이다. 간(侃)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어서 적에게 사로잡히기보다는 자결하였다. 후손으로 원준(源俊)이 있다. 두원 풍류
송운기(宋雲起)
자(字)는 달(達)이다. 첨정(僉正) 경(逕)의 아들로 갑오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역임하였다. 정유재란때 제종(諸從)과 함께 한산, 노량 등의 전투에서 누차 전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종석(宗錫)이 있다. 두원 반산
송호문(宋好問)
현감(縣監) 예정의 증손으로 정유재란때 많은 공을 세워 부장(部將)에 제수되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으며, 후손으로 하옥(河玉)이 있다. 동강 매곡
송홍연(宋弘淵)
순양공(純襄公) 순례(純禮)의 장손으로 임진왜란때 전라병사로서 진주에서 큰 공을 세웠다. 병신년(1596)에는 전부장(前部將)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홍주에서 평정한 공으로 정란훈에 기록되었다. 인조대 충좌위(忠佐衛) 좌부장(左部將), 전부장(前部將), 남해현감, 내금장(內禁將), 온성판관(穩城判官), 개천군수(介川郡守), 위원군수(渭原郡守), 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 무산첨사(茂山僉使), 창주첨사(昌州僉使) 등을 역임하였다. 후손으로 주한(柱漢)이 있다. 동강 매곡
송정립(宋挺立)
자(字)는 신언(信彦)이다. 대립의 아우로 훈련원주부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3형제가 함께 전장에 나아가 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기운(基云)이 있다. 동강 대강
송의련(宋義連)
오서(五瑞)의 아들로 훈련원주부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군량을 내어주는 공이 있었다. 후손으로 진찬(鎭鑽)이 있다.  
송득운(宋得運)
여산
자(字)는 형보(亨甫)이다. 판관(判官) 성(晟)의 아들로 선조대 무과에 올라 수문장으로서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정유재란때는 전라도 운향차관(運餉差官)으로서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명량전투에서 공을 세워 적량만호(赤良萬戶)에 제수되었으며 또 불화살을 써서 적선을 전소하였으므로 나주영장(羅州營將)에 제수되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충강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점섭(点燮)이 있다. 동강 신정
송계훈(宋繼勳)
자(字)는 군보(君寶)이다. 주부 린(律)의 아들인데 계사년(1593)에 판관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또 정유재란과 병자호란때에도 공을 세웠다.  
송응기(宋應璣)
부장(部將) 응민(應珉)의 아우로서 임진왜란때 훈련원주부로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때는 아들 홍부(弘傅)와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붇들려 일본 오사까에 억류되었다. 그러나 끝내 왜군에 항복하지 않고 있다가 유정(惟政)스님의 도움으로 환국했다. 후손으로 연섭(連燮)이 있다. 포두 후동
송계량(宋繼良)
충강공 간의 후손으로 병자년에 등제(登第)하였다. 훈련원부장으로 임진왜란때 아버지 건(建)을 따라 함창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두섭(斗燮)이 있다. 동강 관덕
송계창(宋繼昌)
자(字)는 창보(昌甫)이며 호(號)는 창헌(蒼軒)이다. 첨정(僉正) 해(邂)의 아들로서 신묘년(辛卯年) 무과에 등제하였다.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로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정유재란때 종족형 희립(希立)과 함께 이순신장군 막하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명량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장악원정에 제수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기남(基南)이 있다. 동강 마륜
송계업(宋繼業)
여산
주부 린(律)의 아들로 을사년(乙巳年)에 등과(登科)하여 주부(主簿)가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훈(振武勳)에 기록되었다.  
송응경(宋應慶)
현감 백유(伯儒)의 후손으로 선조대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유재란때 사복시정으로 왜적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에 원종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후손으로 기정(基禎)이 있다. 점암 봉남
송춘세(宋春世)
부사(府使) 두남의 아들로 선조대 무과에 급제하였다. 전부장(前部將)으로 정유재란때 왜군을 맞이하여 싸워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우림위(羽林衛)로 승진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송 한(宋 漢)
수견(壽堅)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작전참모역을 맡아 왜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후손으로 기욱(基旭)이 있다. 점암 서정
송세즙(宋世*)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집하여 현내량(現乃梁)에서 전과를 올리고 남해에서 적선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 공으로 원종 2등훈에 책록되었다. 후손으로 종선(鍾善)이 있다. 점암 용강
송흥운(宋興雲)
자(字)는 정보(貞甫)이다. 충강공 간의 후손인 감찰(監察) 섬(暹)의 아들로 갑오년에 등제(登第)하여 수문장이 되었다. 정유재란때 명량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후손으로 기옥(基玉)이 있다.  
송진부(宋眞夫)
호(號)는 석계(石溪)이다. 충강공 간의 7세손으로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 훈련원부정, 회령첨사(會寧僉使), 경상좌병사를 역임하였다. 정유재란때 의병을 일으켜 용성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고 고흥재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송홍운(宋弘運)
여산
자(字)는 원보(元甫)이다. 군수 홍운의 아우로 정유재란때 형과 함께 전공을 세웠다. 이에 군수에 제수되었다. 후손으로 하수(河守)가 있다. 도화 교촌
송 심(宋 諶)
대립(大立)의 아들로 갑인년에 등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병자호란때 공을 세우고 정축년(1637)에 순절하였다. 숙종 갑신년(1704)에 승정원좌승지에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영조 정축년(1757)에 왕이 관리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정조 을사년(1785) 고흥 운곡사에 배향되었다. 10세손으로 재성(在成)이 있다. 동강 대강
송 지(宋 智)
남양
참봉 승국의 아들로 병자년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판사(訓鍊院判事)에 제수 되었다. 정해년 왜구침입을 방어하고 정유재란때 명량에서 크게 공을 세웠으므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봉수(奉洙)가 있다. 동강 관덕
송 제(宋 悌)
호(號)는 매와(梅窩)이다. 참봉 승국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고 강진현감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593)에 호남의병을 일으켜 의령, 성주, 진주 등지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조 정사년(1797)에 호조참의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진주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찬일(燦一)이 있다. 동강 당곡
송상보(宋商輔)
여산
일명 상보(商甫)라고도 한다. 호(號)는 봉재(鳳齋)이다. 충강공 간(侃)의 후손으로 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행주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당진현감에 제수되었다. 후손으로 영섭(榮燮)이 있다. 고흥 남계
송덕일(宋德馹)
남양
호(號)는 조은(釣隱)이다. 내금장 인(仁)의 아들로 을유년 무과에 등제(登第)하였다. 임진왜란때 훈련원첨정에 제수되고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정유재란때에는 진도군수에 임명되어 거북선(귀선 龜船)을 증수하여 명량에서 왜적을 막았다. 갑진년(1604) 당포에서 많은 적을 참수한 후 동관첨사(潼關僉使)에 제수되었다. 그후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후손으로 정철(釘鐵)이 있다. 동강 당곡
송 선(宋 瑄)
첨정(僉正) 응상(應祥)의 아들로 정축년 무과에 등제(登第)하였다. 정해년 왜적이 녹도를 침입하자 아우, 아들, 숙질 등과 함께 본현을 지키고 임진왜란때에는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그 공으로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때에는 아들과 종질을 거느리고 고금도에서 많은 적을 베어 죽이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동명(東明)이 있다. 대서 안동
송 영(宋 瑛)
호(號)는 귀은(龜隱)이며, 첨정(僉正) 응상(應祥)의 아들이다. 훈련원주부로서 정해년 왜변때 형제, 숙질과 함께 본성을 지켰으며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여 동관첨사(潼關僉使)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때 고금도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승정원 좌승지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운곡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정모(廷謀)가 있다. 대서 신기
송원길(宋元吉)
첨정(僉正) 선(瑄)의 아들로 정해년에 백중부를 따라 향병을 모집하여 본성을 지켰다.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한 공으로 병절교위수문장(秉節校尉守門將)을 제수받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동명(東明)이 있다. 대서 안동
송정길(宋廷吉)
첨정 선의 아들로 정해년 수문장으로 아버지를 따라 본성을 지켰고, 임진왜란때에 의주에 호가한 공이 있으며, 정유재란때 고금도에서 공을 세웠으므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왕묵(枉默)이 있다.
송 구(宋 球)
남양
호(號)는 남곡(南谷)이다. 첨정 응상의 아들이다. 훈련원 판관으로서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고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가선대부에 증직되고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영택(永澤)이 있다. 대서 장선
송유선(宋裕善)
행정(杏亭) 인(寅)의 후손으로 정해년에 본성을 지키고 정유재란때 향병을 일으키어 고금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 제수되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방손(傍孫)으로 동근(東根)이 있다. 대서 안동
송유희(宋裕喜)
자(字)는 희보(喜甫)이고 호(號)는 호안(湖雁)이다. 사과(司果) 기(琦)의 아들로 정해년 왜변때 숙부 및 형제들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아 본성을 수호하고 5성위패를 객사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왜군 침입시에는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활약하여 한산, 고금도, 노량대전에서 크게 이겼다. 사계 김장생 문인으로 관직이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에 이르렀다. 후손으로 철현(哲炫)이 있다. 대서 안동
송유철(宋裕哲)
행정(杏亭) 인(寅)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향병을 일으키어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할약하였다. 고금, 한산전투에서 많은 왜적을 참획하였다. 그 공으로 북부참봉에 제수되었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철현이 있다.
송유문(宋裕問)
자(字)는 문보(問甫)이고 호(號)는 어은(漁隱)이다. 사과(司果) 기(琦)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본 고을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세미(稅米)를 수송하였다. 후손으로 기종(己鍾)이 있다. 과역 석촌
송 결(宋 *)
송촌(松村)의 후손으로 계유년(癸酉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정으로 병자호란때 안우산(安牛山)을 따라 여산에 이르렀으나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절의를 지켰다. 후손으로 기철(基喆)이 있다. 동강 세곡
송응남(宋應南)
남양
덕일(德馹)의 종자(從子)로 병자호란때 의병별장이 되어 경기도 광산교에서 적과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신여량(申汝樑)
고령
호(號)는 봉헌(鳳軒)이다. 홍해(弘海)의 아들로 계미년 무과에 등제하였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에 나아가 한산도 전투에서 거북선으로 적선을 대양으로 유인하여 백여 명의 왜적을 참수하였다. 갑오년에 통영에서 적선을 불살랐다. 그 공으로 첨사에 제수되고 곧 전라우수사에 제수되었다. 왕이 화사(畵師)를 보내어 승전도 및 호궤도를 그리게 하였다. 진도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정려가 내려지고 부조묘의 왕명이 내렸다. 도내 사림의 공론으로 나주 충장사, 본현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양원(良元)이 있다. 동강 마륜
신여극(申汝極)
호(號)는 지정(池亭)이다. 용해(容海)의 아들로 계미년에 등과하였다. 임진왜란때 가동(家尙)과 의병을 이끌고 행주산성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에 훈련원판관을 제수받았다. 나주 충장사, 금산 대첩단, 고흥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순우(順雨)가 있다. 고흥 남계
신여정(申汝楨)
병조판서 여량의 아우로 무자년에 등과하였다.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때 고금도 해전에서 적을 토벌하는데 아홉 차례나 이겼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은대(銀帶)를 하사하고 군자감정을 제수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나주 충장사, 고흥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창우(昌雨)가 있다. 동강 당곡
신여기(申汝杞)
호조판서 홍해의 아들인데 판결사로 임진왜란때 형과 함께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후손으로 승호(承浩)가 있다. 동강
신영해(申榮海)
고령
판관(判官) 광해(光海)의 아우로 임진왜란때 훈련원부정으로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권율장군과 이순신장군 막하에 나아가 전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덕식(德植)이 있다. 동강 마륜
신원방(申元方)
붕(鵬)의 손자로 남원부사로 임진왜란때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후손으로 중우(重雨)가 있다. 과역 월악
신군안(申君安)
현감 수재(秀才)의 아들로 첨정, 호군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때 의병을 모집하여 이순신장군 막하에 나아가 수륙전에서 역전고투하다가 보화도에서 전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호남절의록, 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후손으로 평우(平雨)가 있다.  
신산원(申汕遠)
자(字)는 원로(元老)이다. 훈련원판관으로 임진왜란때 아우 호원(湖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배흥립(裵興立)과 한산도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왕을 의주로 호가한 공으로 통훈대부현신교위(通訓大夫顯信校尉)의 증직을 받았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지우(址雨)가 있다. 고흥읍
신호원(申湖遠)
자(字)는 원제(元濟)이다. 임진왜란때 형 산원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전하였다. 왜군을 참획하고 왕을 의주로 호가한 공으로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또 훈련원부정에 제수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호남절의록, 삼강록, 고흥군지 등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선우(璇雨)가 있다. 고흥 옥하
신여식(申汝拭)
호(號)는 백헌(栢軒)이다. 지지당(知止堂)의 후손으로 활을 잘 쏘아 내승시(內乘試)에서 으뜸으로 뽑혀 첨정에 제수 되었다. 왕으로부터 오총마(烏瘻馬), 언월도(偃月刀)를 하사 받았다. 병자호란때 원두표(元斗杓), 진후평(陳後平)과 더불어 많은 적을 참륙하였다. 영국공신록(寧國功臣錄)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성호(星浩)가 있다. 동강 마륜
신홍수(申弘壽)
고령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에 나아가 옥포, 노량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권율장군 막하에 나아가 행주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에 군자감주부에 제수되고 이어서 청단도찰(靑丹都察) 훈련원정으로 승진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임진록 및 충무실기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연모(淵模)가 있다.  
신 복(申 宓)
평산
자(字)는 석지(碩止)이며 호(號)는 흥덕재(興德齋)이다.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으로 명종대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대 장령(掌令)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한 공으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았다. 후손으로 동주(東柱)가 있다. 두원 내당
오백창(吳伯昌)
흥양
자(字)는 성화(盛華)이며 호(號)는 겸문(謙文)이다. 영노(寧老)의 아들로 세종대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경기도사(京畿道事), 병조정랑(兵曹正郞),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가선대부평안감사(嘉善大夫平安監事), 예조참판(禮曹參判), 자헌대부중추부사(資憲大夫中樞府事),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신묘년(辛卯年, 1471)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흥원군에 봉해졌다. 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헌평(憲平)이며 부조묘(不*廟)에 모셔졌다. 두원 중대 에서 충남대전으로 이주
오순손(吳順孫)
자(字)는 경장(慶璋)이며 호(號)는 약산(若山)이다. 백창의 아들로 세조대 무과에 합격하여 절충장군의흥위상호군(折衝將軍義興衛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자헌대부에 이르러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적개2등공신(敵愾二等功臣)에 책정되고 두원군(荳原君)에 봉해졌다. 숭정대부 의정부좌참찬(崇政大夫議政府左參贊)에 추증되고 양숙(襄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또 부조묘(不*廟)에 모셔졌다.  
오국량(吳國良)
흥양
자(字)는 직재(直哉)이다. 충필(忠弼)의 아들로 선조대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통정대부부령부사(通政大夫富寧府使)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맏형인 득량(得良)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가 울산전투에서 형과 함께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오대남(吳大男)
자(字)는 윤부(胤夫)이다. 복량(福良)의 아들로 1590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판관으로 재임하던 중 북쪽 오랑캐 모진(毛鎭)이 여러 차례 침범하자 이를 격퇴하였다. 다음해 발생한 임진왜란때에도 공을 세웠다.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진도·고원군수,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성천부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이 있어 자헌대부중추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中樞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승진하였다.
우창언(禹昌言)
단양
자(字)는 익배(益戾)이다. 장호공(莊護公) 공(貢)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전직 현감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또 왕을 의주로 호가하는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공신으로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상길(相吉)이 있다. 풍양 냉정
우일남(禹一男)
자(字)는 백천(伯天)이며 호(號)는 사재(思齋)이다. 창언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에 나아가 공을 세웠다. 이에 우림위(羽林衛) 좌승지(左承旨)에 제수되고 형조참판을 증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귀현(貴炫)이 있다.
이양승(李陽升)
흥양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언림(彦林)의 3세손, 위위시승동정(衛尉寺承同正)으로 재임하던 중 고려 고종 3년(1216)에 거란(契丹)이 난을 일으키자 부원수가 되어 상장군(上將軍) 김취려(金就礪)를 따라 정벌에 나섰다.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나 위천전투(渭川戰鬪)에서 역전 분투하다가 사망하였다. 이에 고종이 위위장군(衛尉將軍)을 양승에게 추증하였다. 후손으로 종수(鍾守)가 있다. 풍양 보천
이 언(李 堰)
흥양
호(號)는 낙빈(洛濱)이다. 대사헌 은(垠)의 아들로 집의(執義),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남원도호부사겸권농사(南原都護府使兼勸農使), 전주부윤(全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문양서원(文陽書院), 의흥 (義興) 나계서원(羅溪書院), 풍양 금성사(錦城祠)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하중(河仲)이 있다.  
이수생(李壽生)
호(號)는 청심(淸心)이다. 양경공 언(堰)의 아들로 기묘년에 등과하여 의흥현감(義興縣監), 창원부사(昌原府使), 진주목사(晉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계사년 옥당(玉堂)에 뽑혀 수찬(修撰), 응교(應敎), 광주유수(廣州留守), 진주와 제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좌익훈(左翼勳)에 책록되었다. 풍양 보천
이영명(李永明)
도사(都事) 총(蔥)의 아들로 계유년에 등과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임진왜란때 별시위(別侍衛)로서 왕을 의주로 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무술년에는 조방장으로서 명량전투에서 공을 세워 훈련원판관을 제수하였다. 후에 병조참판을 증하였다. 금성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흥삼(興三)이 있다.
이계종(李繼宗)
부사(府使) 맹무(孟茂)의 아들로 계묘년에 등과하여 운산군수(雲山郡守),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하였다. 병사(兵使) 송덕일(宋德馹)을 따라 북관에서 건주적(建州賊)을 토벌하여 큰 공을 세웠다. 무오년 심하역(深河役)에서 순절하였다. 후손으로 갑삼(甲三)이 있다. 풍양 보천
이 회(李 檜)
양경공(良景公) 언(堰)의 후손으로 을유년에 등과하여 주부가 되었다.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우고 노량진에서 전사하였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고흥군지, 호남절의록, 충무전서 등에 기록되었다.  
이응홍(李應弘)
합천
선전관(宣傳官) 공(恭)의 아들로 경인년에 등과하여 훈련원판관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당포, 한산도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명량에서 전사하였다.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후손으로 개식(개植)이 있다. 동강 덕암
이 원(李 願)
경주
호(號)는 경암(敬菴)이다. 승지(承旨) 정필(廷弼)의 아들로 정축년에 등과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호위장(扈衛將)으로 노량진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견관치제(遣官致祭)하였다. 후손으로 상호(相昊)가 있다. 동강 오월
이계남(李繼男)
우봉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 정(靖)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였다. 정유재란때 고금도 싸움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후손으로 승구(承九)가 있다. 남양 대곡
이능필(李能必)
전주
우림위(羽林衛)에 소속되었다.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 막하장으로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정 걸(丁 傑)
영광
숭조(崇祖)의 아들로 서북만호(西北萬戶)가 되어 출사(出仕)할때 달량에서 왜변이 일어나자 이를 격퇴하였다. 이어 녹도(鹿島) 제주(濟州) 등지에 남아 있던 왜적을 소탕하였다. 임진왜란때 충청병사로 행주에서 왜적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금곡사, 안동사 등에 배향되었다. 후손 달회(達淮)가 있다. 포두 안동
정 윤(丁 潤)
병사(兵使) 걸(傑)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제주에서 적을 격퇴한 공으로 흥해군수에 제수되었다. 그 후 영광군수로 전임되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아버지를 도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후손으로 달회(達淮)가 있다. 포두 안동
정 연(丁 淵)
영광
병사(兵使) 걸(傑)의 아들로, 임진왜란때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때 많은 적을 참획하고 전사하였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고 고흥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달회(達淮)가 있다.
정 식(丁 湜)
수사(水使) 형조(亨祖)의 손자로 당포만호(唐浦萬戶),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당포싸움에서 왜적 수십명을 참수하고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이러한 사실은 호남지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을성(乙聲)이 있다. 도화 고당
정명세(丁鳴世)
불우헌(不憂軒) 극인(克仁)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금성(錦城), 담양(潭陽)에서 왜군을 맞아 격렬한 전투를 하던중 군량과 병기가 부족하여 혈맹한 제공(諸公)과 순절하였다. 유림(儒林)들의 발의로 장성 사거리에 사적비를 세웠다. 후손으로 병무(炳珷)가 있다. 두원 상대
정형조(丁亨祖)
호(號)는 강정(江亭)이다. 참의(參議) 자행(自行)의 아들로 일찍이 무과에 합격하여 교동현감(喬洞縣監)에 제수되었다. 절충장군(折衝將軍) 경기수사(京畿水使)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때 종자(從子) 병사(兵使) 걸(傑)과 함께 이순신장군 막하에 나아가 활약하던중 부산 앞바다에서 적선 백여척을 격파하고 순절하였다. 왕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였다. 후손으로 을성(乙聲)이 있다. 도화 고당
정운희(丁運熙)
자(字)는 회지(會之)이며 호(號)는 고주(孤舟)이다. 감찰(監察) 호(浩)의 아들로 정유년(1597)에 백송호(白松湖)와 이충무공의 지시를 받아 난선(亂船) 10여척을 모아 후원하고 아우 운융과 함께 열읍(列邑)에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하여 난에 참전하였다. 이 공으로 당릉참봉(唐陵參奉)의 직이 내려졌으나 취사하지 않았다. 후손으로 한성(漢聲)이 있다. 도화 신기
정운륭(丁運隆)
영광
감찰 호의 아들이며 운희의 아우로 정유재란때 형 운희와 함께 열읍(列邑)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한 공이 많았다. 후손으로 종관(鍾寬)이 있다. 포두 백수
정홍록(丁弘祿)
군수 연(淵)의 아들로 낙안군수를 역임하였다. 정유재란때 전사한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하고 이튿날 전쟁에 참가하여 순절하였다. 후손으로 달회(達淮)가 있다. 포두 안동
정상준(丁尙俊)
자(字)는 국명(國明)이다. 직장(直長) 응진(應軫)의 손자로 함안군수, 훈련원부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공을 세워 정삼품(正三品)의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가 내려졌다. 후손으로 하천(河千)이 있다. 대서 월등
장 담(張 淡)
인동
장령(掌令) 선(璿)의 손자로 임진왜란때 전라병사로 이순신장군 막하에 나아가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후손으로 병길(炳吉)이 있다. 도덕 가야
장 연(張 淵)
병사 담(淡)의 아우로 병오년에 등과하여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고 평양에서 적을 격파한 공으로 삭주부사(朔州府使)를 제수 받았다. 정유재란때 소사에서 적을 물리치고 순절하였다. 이에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후손으로 기환(箕煥)이 있다. 대서 마암
장천장(張天章)
창녕
참의(參議) 이(彛)의 현손이다. 훈련원첨정으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는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고 이러한 사실이 호남절의록, 읍지 등에 기록되었다. 후손으로 관식(寬植)이 있다. 동강 덕암
장시헌(張時憲)
천장의 아들로 병진년에 등과하여 훈련원판관, 주부,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갑자년(1624)에 선전관으로 왕을 광주(廣州)로 호가(扈駕)하였다. 을축년(1625)에 훈련원판관에 임명된 이후에도 함북도병마우후(咸北道兵馬虞候), 전라우도수군우후(全羅右道水軍虞侯), 벽동첨사(碧潼僉使), 벽동군수를 역임하였다. 이어 무승지(武承旨)로 승진하고 또 훈련원첨정, 어유간첨사(魚遊澗僉使) 등을 역임하였다.  
정명원(鄭名遠)
진주
자(字)는 근가(近可)이다. 충장공(忠莊公) 정분(鄭*)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웠다.  
정영인(鄭永仁)
하동
자(字)는 의직(誼直)이며 호(號)는 원재(源齋)이다. 문성공(文成公) 인지(麟趾)의 후손이다. 한성부판관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행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고 금산 대첩단에 배향되었다. 후손으로 현채(玄采)가 있다. 점암 용강
진무성(陳武晟)
여양
대사간(大司諫) 화(*)의 후손이다. 임진왜란때 당포, 진주 등지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선무훈에 책록되었다.(상세한 것은 역사편 참조) 두원 신송
진후평(陳後平)
무성의 아들로 경오년에 등과하여 마도진만호(馬島鎭萬戶)를 지내고 병자호란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가하였다. 아버지 무성이 쓰던 칠성검으로 많은 호적(胡狄)을 참수한 공으로 개영국공신록(開寧國功臣錄)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최천보(崔天寶)
경주
참봉 최파(崔坡)의 손자로 정해년에 등과 하여 훈련원주부가 되었다. 임진왜란때 대정현감(大靜縣監)으로 한산도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후손으로 복기(福基)가 있다. 두원 예회
황 형(黃 瀅)
장수
자(字)는 응성(應聲)이며 호(號)는 백곡(佰谷)이다. 방촌(尨村) 희(喜)의 후손으로 임진왜란때 왕을 의주로 호가하고 한산도에서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선무원종훈에 책록되었다. 도화 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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