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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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시초에 있었던 이들이 자연철학자들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일인 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철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탈레스는 그의 본향에 성실하게 귀 기울인 마음씨 좋은 아저씨였을 것이다. 그는 밀레투스 사람이니 바다가 그의 정서에 근원적으로 부합했을 가능성은 너무도 크지만, 본향으로서의 바다를 그처럼 즉각적으로 알아차린 그의 영혼은 본향에 민감한 순수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없다면 이 지구별은 얼마나 적적했을까. 달이 그저 바닷물을 밀고 당기고 끌며 놀고 있다고 생각해도 재밌지만, 그런 달의 장난이 없었다면 지구별의 시원이 얼마나 고적했을까 싶다. 밀물과 썰물은 지구별이 숨쉬고 있는 느낌을 육체적으로 가져온다. 내가 들숨을 쉴 때 밀물져오는 몸, 내가 날숨을 쉴 때 썰물로 빠져가는 몸. 한국의 어느 젊은 시인은 <물로 빚어진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쓰기도 했지만 칠 할이 물인 인간은 물로 빚어진 존재들이다. 날마다 밀물과 썰물을 맞으며 달과 우주와 놀고 있는 해변의 어린아이들 같은 존재인 사람을 생각한다.
나는 얼마 전 <루시>라는 시집을 냈다. 화석 인류 루시는 아프리카 사바나 평원에서 발견되었지만 악어 알, 게의 집게발, 해안의 모래와 함께 부식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발견으로 어쩌면 인류의 처음 조상들은 물 속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은 물속을 처음 두 발로 걸었을지 모른다는 증언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속의 물방울 하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을 것이다. 손등에 맺혀있는 물방울 하나가, 수십억 년 전 지구별에도 존재했던 그 물방울 하나라고 생각하면 짜릿하게 오감이 떨려올 때도 있다. 먼 옛날 지구가 생성될 때 생긴 물질들 중 우주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극히 소량이라는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다면, 오늘 내가 보고 있는 바닷물은 수십억 년 전의 그 바다이며 오늘 내 몸에 닿아있는 욕조의 물결은 수십억 년 전 어느 동물이 따뜻한 늪지 같은 곳에서 낮잠을 즐길 때 콧등에 맺혀있던 물 한 방울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물을 자매라고 노래했다. 인간은 혈연으로서 물을 따라 삶의 터전을 건설했다. 인간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한 곳도, 소박한 공동체들이 문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역사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도 물이었다. 강과 호수와 바다에서 옛사람들은 자신의 뼈를 발라내고 그 뼈를 아이들에게 심었다. 생명현상의 근원인 물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리얼리티이며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최상의 판타지이다. 회귀의 열망이 맺히는 장소이며 미래의 우리가 태어나는 곳인 물. 고맙다, 어머니여, 내 자매여.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물은 밑바닥을 향해 간다. 물이 위대해지는 부분은 이 밑바닥으로 흘러가는 낮은 어깨에서 말미암을 것이다. 일찍이 중국 사람들도 근원(源)은 물과 함께 있다, 고 했다. 물의 근기(根氣). 물의 뿌리가 지닌 기운이 있다는 것을 따져보았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천지와 세상 만물이 태고의 거대한 물덩어리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강물 속 물고기 속에조차 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물로 말미암은 모든 생명을 신성으로써 찬양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우주나무의 뿌리가 지혜의 신이자 바다의 신성에 닿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신성한 물줄기가 우주나무의 뿌리로부터 흘러 대지를 비옥하게 한다고 믿었다. 이집트 문명의 나일강과 바빌로니아 문명의 유프라테스 강처럼 고대 중국인들은 세상의 한복판에 있다고 믿은 자신들의 대지 사면이 신성한 바다로 둘러쳐져있고, 양쯔강이 바다와 젖줄을 맞댄다고 믿었다. 성경의 창세기에도 물이 살아있는 것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도록 명함을 받은 이야기나 네 개의 성스러운 강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 물을 대어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일일이 예를 들자면 세헤라자드가 천일동안 낮밤을 밝혀도 부족할 만큼 인류문명은 모든 대륙에 거쳐 물에 대한 상상력의 신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 낱낱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물을 숭배하는 것은 인간 자신,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일과도 통하는 일이다. 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특해지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정화수 한 그릇이 눈동자에 들어온다.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은 집안의 평화와 무병함을 위해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장독대에 올려놓고 기도하곤 했다. 두 손을 반듯이 모으고 달빛 속이나 멀리 반짝이는 별무리를 배경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정화수에 대한 기억을 알지 못하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의 핏 속에도 흘러갈 것이다. 단순하고 깨끗한 소망을 담은 물 한 그릇을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날마다 내 영혼의 장독대에도 올려놓아야 할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지치고 상한 누군가에게 쉴 그늘을 주고 목마른 어린 사람에게 빗방울이 되면서 살고 싶지만 우리는 생각대로 살지 못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 살기 쉬우니, 무엇인가 좀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어느 갈림길에서 정처 없어져 버린다. 그럴 땐 그저 위대한 하늘의 힘을 믿을 밖에. 노자는 말했다. 위대한 신은 물과도 같으시니 애쓰지 않고도 수이 만물을 먹이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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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오르다, 라는 말이 있다. 이른 봄 물오른 갯버들이나 버드나무 아래 가만히 서있으면 물오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럴 때 말 그대로 물오르는 시간 속에 나도 들어 있게 된다. 물은 액체와 고체와 기체 상태를 자유롭게 유동하며 살아있는 것들의 기억을 우체부처럼 배달하는 것 같다. 연애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가 어느새 연애편지 자체를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 물의 사랑법은 염력이 강하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여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의 처마 밑에 고드름으로 얼어있기도 하다가 이른 볕에 첫정을 주듯 녹아내려 마당에 홈을 파기도 하고 하늘로 날아올라 저무는 노을의 뒷자리를 적시기도 한다. 물은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고, 어느 것에도 규정되지 않는다. 매 순간 물의 정체성은 오직 그 스스로이며 그리하여 물이 거쳐 온 모든 것들이 물 속에 남는다. 물은 너무도 많은 기억의 피부를 가진 듯 하다.
물 위에 뜨는 큰 얼음조각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겨울 강가의 부빙을 인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남극의 얼음산들이 바다 위를 떠가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본 일이 있다. 그 풍경이 그토록 놀라웠던 것은 얼음을 일종의 물의 기억이 응결된 상처라고 생각한 것 같다. 얼음은 물이 가진 모든 상처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응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다. 인간의 상처는 자주 숨는다. 어린아이의 상처라도 그것은 무겁고 그것은 가라앉고 그것은 도망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물은, 자신의 상처를 얼음으로 응결시켜 자신의 표면에 흰꽃처럼 활짝 피워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같다. 자신의 몸 위에 자기의 상처를 둥둥 띄워 놓고, 마치 어린 날 아버지가 무등을 태우거나 자기 배 위에 아기를 올려놓고 어르듯이 둥기둥기하는 것 같았나 보다. 물보다 자유로울 수 없고 물보다 고난이 작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 아이에게 물이 실존의 범주로 편입되는 순간이었으리라.
꽃이 시들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꽃에게서 물이 떠났기 때문이다. 내가 늙어 가는 것도 내게서 물이 떠나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 날, 아흔 살 아버지의 마른 등을 부여잡을 때 바삭하던 먼지의 느낌, 그 또한 물이 아버지의 몸에서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이 떠나면 우리는 형체를 잃어버린다. 꽃을 꽃이게 하는 것, 풀을 풀이게 하는 것, 예쁜 송아지의 실루엣, 두루미의 우아한 춤, 사자의 갈기, 한없이 신비한 기린 목의 그림자, 탐스러운 과일들도 물이 만드는 것이다. 물은 모든 것을 빚고 오늘 이 시간 그들을 그들로 존재하게 하는 창조의 버팀목이다. 물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몸을 잃어버린다. 몸을 잃어버리면 영혼이 머물 곳이 없으니 물이여, 나를 만난 내 자매여. 한 방울의 물 속에 든 신이여. 자연의 순환을 관장하는 물방울이여. 가짜인 나와 진짜인 나 사이, 나의 현존과 부재 사이, 순환이 멎을 때까지 그대는 나의 것이다.
우리 말문화에는 참 어여쁜 것이 있다. 비님이 오시네요, 라고 말할 때, 나는 언제나 조금쯤 코끝이 쨍해지는 느낌이 든다. 고대로부터 인류에게 비는 성스러운 것이었다. 비를 처음 본 원시부족의 인류가 빗물로 얼굴을 적시고 입 속을 적실 때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나뭇잎에 고인 빗물을 털어 마시면서 비님이 오신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고 숭고한 것일 때, 비처럼 아름다운 하강의 형태를 생각한다. 인류의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비는 대지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도 양분을 공급한다고 여겨졌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비처럼 내리는 성령의 은혜를 말하고,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신을 ‘비 내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호칭하며 비가 내리는 것을 ‘신이 내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비님이 오시네요. 신이 오시네요. 라고 말이다.
지구는 말 그대로 ‘물의 행성’이다. 지구상의 물이 지구를 아름다운 푸른 별로 보이게 한다. 그렇지만 인류가 사용하기에 비교적 충분한 양의 담수가 존재한다는 지구상에는, 물이 고르게 분배되어 있지 않다는 큰문제가 있다. 갈수록 물이 귀해지는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나는 물의 불평등한 분배 문제가 얼마나 깊은 고통을 초래하는지 보아왔다. ‘땅을 치고 운다’는 말이 있지만 땅을 칠 힘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 깨끗한 한 모금의 물을 얻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들의 주머니에 돈이 없기 때문이다. 저러한 경제원칙에 의해 우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리던 물의 축복을 빼앗긴지 오래이다. 인도의 신성한 강 갠지즈와 야무나는 가장 성스러운 강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염된 강이기도 하다. 두 강 모두 대도시를 통과하여 흐르는 동안 공장폐수와 농경지의 각종 비료와 농약들, 엄청난 생활하수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간다. 오염된 몸을 이끌고 갠지즈의 신성은 자신에게로 치유의 기적을 바라고 오는 사람들을 여전히 위로하지만, 더러운 물로 들끓는 제 몸을 얼마나 아파해야 할까. 여전히 인간을 위해 축복의 말을 전해주고 있는 갠지스 강의 신성 앞에 당혹과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다.
문득 아이들의 몸냄새가 난다. 비 오는 밤 혹은 눈 내리는 날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떠올라 잠을 못 이룰 때가 있다. 우기에 유독 추위를 타는 아이들이 흙집이나 돌집 구석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으리라. 오늘 내리는 비, 오늘 내리는 흰눈은 저 아프리카의 아이들의 둥근 하늘을 거쳐서 여기로 왔을 것이다. 아이들의 입김이 뿜어 올린 구름들이 비누방울처럼 여럿 흩어져 있고, 물 한 동이를 구하기 위해 하루 낮을 꼬박 걸어야하는 여인들의 맨발이 풍성한 비구름을 여기로 보냈을 지도 모른다. 동쪽에서 내가 먹으면 서쪽에서 누군가는 굶주리게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누리는 데 자격 운운한다면 어불성설이다. 공평하게 나누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선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오늘 촉촉한 단비가 그저 온 것이 아니기에 빗방울 하나가 내게로 오는 경로를 몸의 말로 일러주면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한다.
내가 구름의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침묵의 말이기 때문이다. 묵언의 광채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에 구름은 명확하게 언어의 형상을 띠고 있는데, 그 언어는 시끄럽지 않다. 그러면서 묵언의 이미지가 주는 고요함은 저릿저릿 다가온다. 언제나 구름 한점 없는 하늘보다 구름 몇 개 떠 있는 쪽이 낫다. 내 기억에, 구름이 없는 맨 하늘은 빈 밥그릇 같은 서늘한 느낌을 주곤 했다. 적어도 케냐 키베라 같은 빈민촌에서 아이들과 엉겨있을 때 올려다 본 하늘에 구름 한점마저 없으면 언제나 몹시 쓸쓸해지곤 했다. 아마 아이들도 그랬으리라. 물이 없는 하늘엔 구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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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찰랑찰랑하게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가라앉힐 일이 많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처까지 들이밀 일이 많다. 물이 지니는 치유의 힘을 체득하고 있었기에 여러 문화권의 정원과 사원에는 빠짐없이 수로나 샘이나 연못이 있다. 전 세계 모든 인종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많은 여성들이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다 가까이에서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열대국가나 따뜻한 나라의 원주민들이 진통 중에 바닷가의 얕은 물속을 걷거나 물속에서 아기를 낳고 있다. 물과 물 흐르는 소리는 마음 바깥의 소음을 차단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흐르는 물, 움직이는 물이 사람의 마음에 이르러서는 고요하게 정지하는 영적인 울림을 미치는 이치는 놀랍다. 역동적인 움직임의 소리가 고요한 묵념의 세계를 잉태시키는 놀라움 말이다.
아름다운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켈트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물로 치는 점들 중에 우물가에서 예언을 얻는 처녀들의 이야기가 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들이 어느 아름다운 날을 받아 우물물을 마시고는 우물가에서 그대로 잠을 청하여 꿈속에서 미래의 신랑감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우물물이 신랑감을 보여준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사랑하게 될 운명의 사람을 알고 싶어 엄숙하게 우물물을 마시고 잠을 청하는, 양 볼이 복사꽃 같은 처녀들을 떠올리면 어머니의 처녀적 모습이 연상된다. 실제로 성 아그네스의 우물이 서로를 맺어주었다고 말하던 쾌활하고 웃음 많은 중년의 부부를 로마행 비행기 안에서 만난 적이 있다. 성 아그네스를 기념하는 축일 무렵에 처녀들은 아그네스의 우물가를 찾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아그네스에게 속삭인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 안의 소망이 신성하다는 각성을 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물은 사랑과 지혜를 향해 자란다.
섬들은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다. 수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섬들도 많다. 인간은 섬에 갇히기도 하고 스스로를 깊은 섬에 가두기도 한다. 인간은 진짜 자신의 섬 밖으로 나와 버려서 고독한지도 모른다. 바다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그러한 섬을 통해 보여주기도 하고, 섬에 갇힌 삶을 넘어서려는 사람들을 통해서 승률조개의 파랑새 이야기 같은 아름다운 의미구조를 선사하기도 한다. 승률조개는 머리를 파랗게 삭발한 스님머리를 연상하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파랑새를 품고 있다는 승률조개에 관해 정약전의 <현산어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승률조개는 밤송이 조개에 비해 털이 짧고 가늘며 빛깔은 노랗다는 것이 다르다. 창대라는 어부의 말에 의하면, 지난달 한 구합을 보았는데, 그것의 입 속에서 새가 나왔다고 한다. 그것은 이미 머리와 부리가 형성되어 있고 머리에 이끼 같은 털이 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미 죽은 것인가 의심해서 만져보니 움직이는 것이 보통 때와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그 껍질 속의 모양은 보지 못했으나 이것이 변해서 파랑새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변해서 새가 된다고 하여 흔히 말하는 율구조(栗逑鳥)가 이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것을 경험한 바 과연 그렇다.”
승률조개라는 이름은 이름의 낯섦만큼이나 재미있고 호기심을 끈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지은 <현산어보>는 이 지식인의 유쾌한 지적 방랑과 끊임없이 무언가 채록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성실한 학자의 품새가 담뿍 드러난다. 그의 유배생활은 풍류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이 흘러가는 길을 보여주는 훔쳐 담고 싶은 풍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무튼 승률조개는 성게의 한 종류로 우리의 눈에 익숙한 모양새이다. 지금의 흑산도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왕장구라고 부른다. 잔털이 조개껍질을 에워싸고 있는데 모양이 마치 새둥지 같다. 그 잔털을 벗고 나면 정말로 삭발한 머리 같은 그 승률조개의 중간에는 구멍이 나 있기 십상인데, 한 물소리 들은 선사의 깨우침이 승률조개의 중심구멍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은 안에 있는 조개가 먹이를 먹기 위해 몸통 밖으로 속살을 꺼내는 구멍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개 속에서 새가, 그것도 파랑새가 나왔다는 발언의 경이로운 시적 울림이다.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몸을 떨었더랬다. 승률조개처럼 모든 ‘궁금’의 의지는 파랑새가 되는 창조적 초월과 변화에 있는 것일까.
구름의 삶이 그러하리라. 구름 속에서 소나무가 나오고, 소나무 속에서 바위가 나오는 삶이 그러하리라.
바다다. 바다는 천국이다. 바다는 극락이다. 바다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의 가장 너른 제단이다. 왜 그렇게 바다를 찾아 바닷가에 오두막을 세우고 또 허물곤 했을까. 비어 있는 곳을 찾아다닌 것이 아닐까. 도리 없이 길을 잃게 되는 곳을 찾아간 것은 아닐까. 다른 데서는 더 이상 이런 곳이 없다는 것을 부안, 고창, 우도, 강진, 고흥 등지에서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심지어 캐나다에서도 호숫가 인디언 마을에 살았다. 걸음이 환한 물을 따라 내려갔다 오곤 했다. 많은 입구가 모인 바다의 초입을 더욱 좋아 했고, 모든 길이 드나드는 항구를 보고 싶어 했다. 오, 성전을 차리는 바다의 일몰 앞에서 묵독이 모든 것인 저녁을 사랑했다. 육지의 모든 강들이 저마다의 추와 악들을 지고 흘러들어와 모이는 곳에서 나는 깨복쟁이 소년이 된다. 바다 앞에서 나는 고래를 타고 가는 말 없는 노인이 된다.
오늘 고흥 구암바다 앞에서, 내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축복이기도 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축복이기도 하다. 아무렴 어떠한가. 중요한 것은 내가 다치고 당신이 다쳤다는 것인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물로서 나누고자 하는 조그마한 마음으로 따뜻하다는 것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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