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흥관련문학

삶의 이야기(전성태)

by 고흥을 찾아서 2010. 5. 10.

방앗간과 사탕

- 전성태

'오마도(五馬島)'는 소록도 한센인들을 소재로 한, 이청준 선생의 장편소설『당신들의 천국』에도 나오는 지명이다. 1962년 한센인들이 정착지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거의 맨손으로 바다를 메우는 간척 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988년 완공된 오마도 간척지에는 한센인들이 한 명도 정착하지 못했다. 오마도는 그 간척 공사로 너른 들에 자리 잡은 육지 마을이 되었다.

막내이모와 이모부는 그 사연 많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방앗간을 했다. 얼마 전에 이모부를 만났을 때 방앗간 문을 닫았다고 했다. 재래식 방앗간은 이제 규모 있고 시설 좋은 도정공장에 밀리는데다가 웬만한 농가에서는 가정용 도정기를 구비해 놓고 산다고 하였다. 이모부는 방앗간이 애물단지가 되었다고 걱정이 많았다. 고물로 처분해도 백만 원이나 받을까 싶고, 아까운 마음에 남겨 두자니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지난 해 태풍에는 양철 지붕이 날아가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나는 방앗간을 박물관으로 남겨 두자고 권했다. 소록도 한센인들의 역사를 위해서도, 우리들의 추억을 위해서도 방앗간이 보존되었으면 싶었다.

어찌 보면 방앗간은 농촌 사회에서 유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근대적인 공장이었다. 디젤 발전기로 돌아가는 방앗간에 들어서면 거대한 시계의 태엽 같은 부속들이 우렁찬 기계음과 먼지를 쏟아 냈다. 농촌의 겨울은 잠들지만 방앗간은 겨우내 깨어서 쌀을 찧어 냈다. 마을별로 방아 찧는 날을 예약해 두었다가 날이 되면 소달구지에 나락을 싣고 방앗간으로 갔다.

내가 방아 찧는 길에 따라나서기 시작한 건 아마 예닐곱 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인적 없는 산길을 통과해야 너른 들이 나오는 길은 꽤나 으스스했다. 그 길에서 도깨비나 귀신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많았고, 그 길을 지나자면 자연 몸이 움츠러들었다.

방앗간 앞에는 주점이 있고, 점방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종일 투전판이 벌어졌다. 점방에는 내 또래 여자아이가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에 콧물을 많이 흘리는 아이였다. 방앗간을 따라 오는 아이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방앗간을 구경하는 일도 금방 시들해지고, 나는 이내 주전부리에 눈이 멀어 점방을 기웃거렸다. 어느 결에 그 집 딸아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탕을 물어서 볼이 불룩했는데 콧물이 고양이 수염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그 아이가 입 안에 든 사탕을 내밀었다. 나는 하도 군침을 흘리던 참이라 콧물이 께름칙한데도 받아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다시 돌려 달라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아이는 아예 준 게 아니라 한 번 빨아 보라고 내민 것이었다. 나는 아쉬워하며 사탕을 돌려주었다.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어 소꿉놀이를 하고 놀았다. 나는 아빠, 그 애는 엄마였다. 방앗간 뒤편으로 갔다가 쌀겨를 뒤집어써서 노인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 아이는 꼭 “냠냠, 밥 묵자” 하는 놀이 시간이 되면 입안에서 사탕을 뱉어 내 내밀었다. 역시 한 번 빨고 돌려주어야 했다.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이고, 저녁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우리 집 방아가 끝나서 나는 달구지에 올랐다.

이듬해에도 방앗간을 찾아 그 점방 딸아이를 만나서 놀았다. 1년 만인데도 우리는 어제 헤어진 아이들처럼 신랑 신부가 되어 소꿉놀이를 했다. 그 아이에게 사탕을 받아먹을 때면 어린 마음에도 장차 그 아이의 진짜 신랑이 되면 어쩌나 겁이 나곤 했다. 그런데도 사탕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그 다음해에 다시 방앗간을 찾았을 때 점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른들은 그 집 사람들이 돈 문제로 야반도주를 했노라 했다.

방앗간처럼 잔해만 남은 기억인데도 그 사탕 맛과 아련한 두려움은 지금도 또렷하다. 이 추억을 위해서도 방앗간이 하나쯤은 세상에 남아도 좋지 않을까.

작가소개
이야기 들려주는 남자, 전성태 님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과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가 있으며,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