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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문학

가끔 옛 이야기를 할 때 (전성태)

by 고흥을 찾아서 2010. 5. 10.

가끔 옛 이야기를 할 때 

- 전성태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을지 모른다고, 요즘 세상은 어느 곳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서울 토박이들은 뽕밭이었던 잠실의 변화상을 보고,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혀를 두른다. 그뿐이랴. 영등포 일대가 근대적인 공단 지역으로 탈바꿈하기 전에는 시흥과 더불어 서울의 주요 채소 공급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 드물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모두 그런 세월 위에 놓여 있다.

 고흥 나로도에 우주 센터가 세워지고 인공위성을 발사하면서 내 고향이 전에 없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곳은 참 멀고도 먼 곳,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다. 옛날 삼촌이나 형들은 객지에서 색싯감을 얻으면 호적에 올리기 전에는 고향에 데려와 인사도 시키지 말라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매년 명절이나 기제사에 시댁에 다닐 것을 생각하면 지레 겁나서 도망간다는 거였다. 나 역시 어느 추석 명절에 열아홉 시간이나 걸려 고향집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 소리가 마냥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 외진 곳이 이제 우주로 통하는 문이 되었으니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고향땅에 우주센터가 세워진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어느 세대나 꿈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보며 꿈을 키운 세대이다. 어른들이 드라마 〈여로〉, <전우>, <옥녀>에 열광할 때 조무래기였던 나는 만화영화 <마징가 제트>와 <은하철도 999>에 정신을 빼놓았다.

 <마징가 제트>와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주를 상상하게 되었고, 나는 장차 우주 과학자가 되겠노라 꿈을 꾸었다. 중학생 때까지 마을의 들과 산에 토굴을 파서 아지트를 만들고 <소망연구소>라 이름 붙여 놀았던 데에는 그런 만화영화의 영향이 컸다. 

 어느 해질 녘, 멀리 들에서 어머니와 손수레를 끌고 오던 고갯길이 떠오르곤 한다. 어머니는 뒤에서 밀고 나는 앞에서 끌었는데, 수레에 짐이 가득해서 서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운 숨을 토하며 오가는 얘기가 많았다. 달이 떠서 익어 갔고, 어머니의 인생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차올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른이 되면 우주선을 만들어서 달구경을 시켜 드리겠노라 말씀드렸다. 처음으로 내 꿈을 얘기해 드린 셈이다. 그때 어머니의 반응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저녁의 기억을 나 혼자 기억하고 사는 줄 알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 아내에게 그 저녁의 얘기를 들려주는 걸 들었다. 내 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호강시켜 주겠노라는 말이 어찌나 대견스러웠는지 모른다는 말씀이었다. 아마 어머니는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모르실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이 서로 다를 것이다.

 어머니가 병들어 눕고 모든 기억들을 잃어 갈 때 자식으로서 많은 회한이 남는 가운데에도 어머니가 그 일을 기억하고 계셨던 일이 자꾸 떠오르고, 얼마간 위안이 되었다. 사는 재미에 그런 것도 있나 보다. 누군가에게 들려준 얘기가 한때 상대에게 위안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기억'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시 내게 위안으로 돌아온다는 것. 어머니를 잃어 가고 있는 나로서는 어머니에게 달구경 약속을 한 일보다 어머니가 그 얘기를 고맙게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이 더 소중한 추억이다. 

상대를 앞에 두고 옛 이야기를 나누는 여러 이유 중에는 그런 그리움에 닿고 싶은 심정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리움을 나누는 시간이 또 다시 추억이 된다. 우주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지만, 우주 센터는 마치 우리 모자를 위해 세워진 것만 같다. 

작가소개
이야기 들려주는 남자, 전성태 님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과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가 있으며,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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