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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문학

전성태의 산문 "젖동냥"

by 고흥을 찾아서 2011. 6. 26.

젖동냥

전성태

 

나는 늦되게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육 남매 중 다섯째였는데 부모님은 한 해 꿇으면서 동생을 돌보라고 했다. 세 형이 도회지 상급학교로 유학을 나가서 부모님은 뒷바라지에 숨 돌릴 겨를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손위 누이도 중학교 진학을 한 해 늦추고 면 소재지의 인형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사춘기 누이가 퇴근길에 앙고라 털을 묻혀 오는 모습도 그렇지만 빈 도시락 딸각이는 소리는 어린 마음에도 왠지 퍽 슬펐다. 

 부모님한테서 한 해를 꿇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더러 여자아이가 애보기로 학교를 꿇는 경우는 보았어도 사내아이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보통 상하는 게 아니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나자 나는 체념하고 포대기를 둘렀다. 어린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소꿉놀이를 하고 나물을 캐러 다녔다. 동생에게 젖을 물리러 먼 들길을 걸어 어머니를 찾아가기도 했다. 아이가 아이를 돌보는 꼴이어서 동생을 업었다기보다는 엉덩이에 걸치듯 해서 질질 끌고 다녔을 것이다. 점차 요령이 붙어서 젖 먹이러 먼 길 가야 할 때는 먼 길을 가는 대신 동네 아주머니들을 찾아갔다. 윗집 이웃 아주머니를 비롯해 마을에는 아이에게 젖 물리는 애어멈들이 여럿 있었다.
 “젖 좀 줘요.” 
 처음에는 젖을 잘 물려주던 아주머니들이 횟수가 잦아지자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꼭 갚을게요. 젖 좀 줘요.”   
 “쳇, 니까짓 게 뭔 수로 갚어야?” 
 어디서 얻어들은 말이 있어서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우리 엄마가 젖이 많은게 꼭 갚어줄게요.” 
 젖동냥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혼을 냈다. 남의 젖이 어디 살로 가겠느냐는 거였으며, 젖이 불어 하루 종일 고생했다는 지청구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좀 더 나은 돈벌이를 찾아 토마토 농사를 지었다. 토마토가 익자 어머니는 읍내 장으로 내다팔았다. 녹동장은 이십 리 밖 포구였다. 나는 버스로 토마토를 내가는 어머니를 따라나서는 일에 재미가 들렸다. 어머니는 여간 귀찮아하지 않았다. 번잡한 장터를 싸돌아다니다가 길 잃을까 걱정이었을 테고, 국화빵이며 장난감이며 사달라고 떼쓰는 꼴이 흉했을 것이다. 

 장날이 오면 어머니와 나는 항상 전쟁을 치르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떼놓고 가려고 애썼고, 나는 따라가려고 기를 썼다. 나는 동생을 포대기로 둘러업고 어머니보다 앞서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비석 뒤에 숨어 있기도 했다. 오죽하면 어머니는 차장에게 “저놈 좀 못 타게 하소” 해서 우리 형제를 떼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정말 버림받은 자식처럼 서럽게 울면서 고무신 뒤꿈치가 늘어지게 버스 꽁무니를 쫓아가기도 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단단히 벼른 모양이었다. 파장을 하고 으레 차부로 가야 할 어머니는 읍내 외곽으로 난 농로로 나를 걸렸다.
 “차가 떨어졌응게 걸어가야 쓰겄다.” 
 어린 내 눈치로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엄마, 저거 버스 아녀?” 
 나는 무슨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아이처럼 멀리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 불빛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 보였다. 어머니는 듣는 기척도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저거 버스 맞당게.” 나는 자꾸 그런 소리를 했으나 어머니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읍내를 벗어나 들판으로 나섰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달이 떠올랐다. 한 번도 와보지 못한 마을과 길 들이 지나갔다. 나는 이내 지쳤는데도 흡사 시험에 든 아이처럼 꾹 참고 걸었다. 딴에는 나는 어머니의 결심이 얼마나 대단한 줄 눈치 채고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결심과 오기로 저문 길을 걸었다.
 잠든 동생이 등에서 척척했다. 자꾸 걸음이 뒤쳐졌다. 배도 고프고 다리가 파근해서 곧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나는 동요를 몇 곡 흥얼거리고 돌멩이도 차보았다. 어머니는 앞서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숨이 목에까지 차올랏을 때 나는 동생을 뒤로 꼬집었다. 동생이 자지러졌다. 
 “엄마, 야가 배고픈갑네.” 
 그제야 어머니는 발걸음을 세우고 내 등에서 포대기를 풀어 내렸다. 풀숲에 앉아 어머니는 동생에게 젖을 물렸다. 소리 내어 젖을 넘기는 동생을 나는 맥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다음에도 또 따러나설래?”
 어머니는 이내 좀 누그러져서 물었다.
 “그러니게 왜 자꼬 따라나서냔 말여.”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동무들은 핵교 댕기느라고 쎄 빠지게 공부하는디 니는 맨날 장바닥에나 따러나서서 어짤꼬.”

 나는 서럽고 배가 고파서 졸듯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옆에 앉은 내 머리를 쓸어 주었다.
 “배고프지야? 아나……” 
 난데없이 어머니가 한 쪽 가슴을 풀어서 내밀었다. 나는 주춤 물러났는데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는 쭈뼛쭈뼛 다가앉았다.
 “다 묵고살자는 일인디 나가 뭔 짓인지 몰겄다.”
 어머니는 한숨을 폭 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그 소리가 퍽 슬펐다. 목만 축이고 물러나 앉으며 나는 이제 우리 엄마가 젖이 많다는 말은 내지 않겠다고 속다짐을 했다.

작가소개
이야기 들려주는 남자, 전성태 님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과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가 있으며,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