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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문학

정명수의 수필 "소록도"

by 고흥을 찾아서 2011. 5. 26.

 

소 록 도

정 명 수

 

국토의 동남단에 자리한 고흥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섬들이 그 파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이곳은 국립다도해 해상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고흥반도의 끝자락에는 크고 작은 해상의 화물선이 오가며, 수많은 고기잡이배들이 드나드는 녹동포구가 있다.

 

이 포구는 조선 초기에 사도진 첨사가 다스리던 수군이 적 방비를 위해 진을 치기도 했다. 이곳에서 10여 리쯤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이 있다.

 

녹동포구의 맞은 편 바다 건너에 수목이 울창하고 은빛 모래 띠를 두르고 우뚝 솟아 있는 섬이 소록도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을 따라 이곳으로 도시락을 허리에 차고 10리 길을 걸어서 소풍을 가기도 했었다.

 

소록도는 녹동에서 불과 700여미터 거리에 있는 섬이다. 섬이지만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지금은 연육교가 가설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다.

 

산에는 하늘을 치솟은 삼나무와 껍질이 두꺼운 참나무가 무성하고 그림 같은 적송과 아담한 해송이 많으며 매화, 철쭉, 진달래가 철따라 피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숲이 푸르고 공기가 맑아 누구나 살고 싶어 했다.

 

1916년 2월 일본인들이 나병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부지 2만평에 건물 47동을 지어‘자혜의원’으로 개원했다. 그 후에 병원의 이름을 나병원, 중앙나요양소, 갱생원등으로 불어오다가 1960년 7월에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환자 수가 6.100명이나 되었고 병원장은 일본 천왕이 직접 임명하여 배치했다. 150여만 평에 달하는 이 섬에는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누어 경계선을 치고 철조망을 쳐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도록 했었다.

 

 지금은 ‘병사지대’라는 푯말만 세워 놓았고 그 옆에는 ‘수탄장愁嘆場’이라는 간판이 있을 뿐이다. 나병환자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부모와 격리시켜 보육사에서 길었다.

 

부모는 경계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갈라선 채 한 달에 한 번씩 미감아를 만나야만 했다. 지척의 거리에 두고도 혈육을 껴안아 보지도 못한 채 눈으로만 만나야 하는 비참한 광경이 이곳에서 이루어 졌었기에 ‘수탄장’이라 불렸다 한다.

 

나병은 자식의 병이 부모에게는 전염되지 않지만 부모의 병은 전염될 수 있다고 한다. 형의 병은 동생에게 옮겨지나 동생의 병은 형에게 옮겨지지 않으며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나병이면 부부간에 전염이 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소록도에 수용되어 있는 환자들은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다. 한 번 수용되면 마음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8.15 해방을 맞아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나환자들이 소록도를 뛰쳐나와 길거리를 해매고 다닌 적이 있었다. 벙거지 모자에 깡통을 차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각설이 타령을 하고 구걸을 했다.

 

그것을 본 나는 벌벌 떨면서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모른다. 마을 근처에 있는 동굴에 거적을 깔고 두세 사람이 함께 생활하면서 무리지어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문등병은 어린아이를 잡아 간을 내어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헛소문이 돌아 어른들은 문둥이에게 잡히면 죽는다고 도망가라고 일렀다.

 

그 말을 믿고 나환자만 보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다. 나병은 눈썹이 없고 코가 문드러지고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보기에도 흉측했다. 어른들은 전염될까봐 주의를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었나 보다.

 

정부가 들어서고 질서가 바로 잡히기 시작할 무렵부터 길거리에 나 돌아다니는 나환자는 많지 않았다.

 

나는 소록도와 가까운 시골에서 살았기에 피부색과 얼굴만 보고도 나환자임을 안다.

 

몇 해 전에 친구와 함께 소록도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소록도에 사는 친구가 있어 안내를 받아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잘 정리된 가로수와 정원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으나 병사지대의 많은 집들이 텅 비어있었다. 지금은 DDS라는 치료약이 개발되어 나병 치료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어 환자 수가 많이 줄어 수용 인원이 7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직원지대에서 병사지대로 갔다. 8.15 해방을 맞아 환자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다가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처참하게 학살당한 84인의 영혼를 기리는 추모비를 보았다.

 

비문을 보니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서 한센 가족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인권회복을 염원하는 상징적 기념비였다.

 

녹동포구가 바라다 보이는 바닷가에 우뚝 솟아있는 3층 백색의 건물을 본다. 한센병 환자를 돌보아 주는 국립소록도병원이다. 의사 10여 명과 90여명의 간호사와 조무사가 일하고 있다.

 

병원 옆에는 노인 병동이 있고 바로 그 뒤편에 환자들을 검사하는 검사실이 있다. 검사실로 들어가니 나무판대로 만든 이동식 수술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환자를 검시하고 정관절제 수술도 했다고 한다. 기분이 으스스하다. 정관절제 수술을 받은 환자부부는 동거생활을 허용했다.

 

건물 뒤로 돌아가니 쇠창살이 보인다. 죄를 지은 환자의 감방이다. 몇 해 전만 해도 교도관이 파견되어 섰다고 한다.

 

문둥병 환자는 천형의 섬인 소록도에서 상실된 삶의 비애를 느끼며 한평생을 살아간다. 슬픔을 삭이고 서러움만이 쌓여가는 나날이기에 애처롭기 그지없다.

 

중앙공원에 들어서니 자연과 환경이 조화를 잘 이루어 남국의 정취가 물신 풍긴다. 6.000평이나 되는 드넓은 대지에 야자수, 향나무, 은사시, 종려수, 황금편백, 팔손이, 치자나무등이 아름다운 수목으로 가득하다. 이들 나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대만에서 들어와 심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 공원은 일본인 4대 원장인 수호마사스에周防正季가 병든 환자들을 동원하여 1936년 12월에 착공 3년4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하고 그 후 두 번에 걸쳐 확장공사를 했다. 수호마사스에는 벽돌공장과 도로공사에 환자들을 강제로 투입하고 벽돌굽기, 숯굽기, 가마니짜기, 등으로 고된 일을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돈까지 거두어서 자기 동상을 세워 원성을 샀다.

 

매월 20일을 ‘보은 감사의 날’로 정해 놓고 환자들을 동원 자기 동상 앞에서 절을 시키기도 했다. 나환자인 경북 성주사람 이춘상李春相은 수호마사스에가 ‘보은 감사의 날’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연단으로 가고 있을 때 수호원장에게 다가가 ‘너는 환자들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으라’고 소리치며 오른쪽 가슴을 찔려 숨지게 했다.

 

이춘상은 총독부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이 집행되어 숨을 거두었다. 지금은 독립유공자로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럽다. 수호마사스에가 죽은 자리에는 나병환자를 구원한다는 희색의 구라탑이 세워져 있는데 날개달린 ‘천사탑’이다.

 

탑의 기단에는 ‘나병은 낫는다’는 비문을 새겨놓고 가엽게 살아가는 나병환자들의 삶을 위로하고 격려해준다.

 

눈을 돌리니 자연석에 음각된 나환자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시비가 보인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필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필닐닐 환자들의 삶의 처연함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고단한 삶을 살던 나환자들에게도 희망이 있었으니 3공화국에서 추진한 고흥군 오마도 간척사업이었다. 이들을 간척사업에 동원하여 방조제를 쌓게 하고 냉대 받던 환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간척지 1,100정보를 나눠주워 음성나환자 1,150세대를 소록도에서 이주시켜 살게 했다.

 

그때에 한하운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어제 깡통을 들던 손은 이제 씨앗을 뿌리는 손이 되고 어제 문전걸식에 굽신거리던 허리는 이제 대지를 향하는 일하는 허리가 되었다.

어서 욕되었던 얼굴을 치 들어라 언제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눈으로 하늘과 땅과 산천초목을 마음껏 보하라 -(세월이여) 중에서

 

나병은 하늘이 주는 형벌이라고 했다.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한 세상 살다 죽어갔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등진 체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애잔하고 눈물겹다. 천형이라니, 그들이 그 누구에게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부쳐진 말인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천대하다니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어본다.

 

 

정명수 전남 고흥(도덕 회룡)출생

          동국대 행정학과 졸업 국방부 부이사관(전)

          수필춘추로 등단. 수필춘추문학회 회원

          월간모던포엠 상임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수상 : 근정포장, 예비군포장, 서울시장상외 다수

         세종문화예술대상, 육사문학상수필대상,
          불교문학상대상, 릴케문학상  

저서 : <이제는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노을져 가는 언덕에 올라>

대표작 : 소록도, 흔적, 보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