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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문학

김향자의 수필 "나도 시 지어 놓은 것이 있는디"

by 고흥을 찾아서 2011. 5. 26.

나도 시 지어 놓은 것이 있는디

김향자

 

어머니가 당신의 87세 생신상 앞에서 느닷없이 “나도 시 지어 놓은 것이 있는디.”라고 하셨다. 팔순 노모의 입에서 ‘시’ 라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말문이 막힌 자식들을 향하여 정색하시고.

 

“왜 그렇게들 놀래느냐? 시 짓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더냐? 나 같이 못 배운 사람도 감정이 있는 법이여. 사람이 한평생 살다 보면 즐거움도 있고, 한도 생기기 마련이제. 가슴 속에 품어 온 것들을 말로 쏟아내면 시가 되는 것이지.”

하시더니 당신이 지으셨다는 <동백꽃>이라는 시를 줄줄 외우셨다.

내 너를 그곳에 심을 때는/ 측간 가리려고 심었건만/내 그런 마음도 모른 채/ 잎 피우고 꽃 피워/그 도랑 환하게 비추니/미안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춘삼월 좋은 날 받아/좋은 거처 마련해 주마.
- 신덕순의 <동백꽃>

입을 다물지 못한 자식들을 향하 여 “아직도 많이 있어야. 내 시에는 구구절절 사연이 있다.” 며 한숨을 쉬셨다.

 

당신이 시를 짓기 시작한 것은 둘째아들을 미국으로 떠나보내면서부터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지만, 이 아들에게 쏟는 당신의 애틋한 사랑은 한층 각별하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그 녀석은 공부를 잘했다. 대학 졸업 후 유학을 갈 수 있는 조건이 주어졌는데도 동생들의 학자금으로 쪼들리는 가정형편을 생각하여 스스로 취업을 택했던 아들이다. 봉급과 아르바이트로 여동생의 대학 학자금을 감당했다. 그 애가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던 날, 혼기마저 놓쳐 버린 나이에 비로소 유학길에 올랐다.

 

퇴직금 전액을 어머니 통장에 넣어 둔 채로. 더구나 여비 때문에 걱정할 부모의 처지를 헤아려 떠나는 날에야 공항에서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런 아들이 겹친 과로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던 40여 년 전 그날, 어미의 설움을 달래며 읊으셨다는 시가 ‘백목련’이다.

타국 간 아들 대신 뜨락에 심은 백목련/봄에는 하얀 꽃 여름에는 무성한 잎/그리도 왕성하더니/차가운 밤 서리에 추워서 떠는구나/눈보라 속에 너도 혼자 나도 혼자/설 지나 봄이 오면/너도 피고 나도 피자꾸나.
- 신덕순의 <동백꽃>

이 시는 고복수의 ‘타향살이’ 곡에 맞춰 노래로 부르셨다. 당신의 애창곡이라면서.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 머나먼 타국 땅, 치료비 한 푼 보탤 수 없는 가난한 어미의 한과 애절한 모정이 가슴을 친다.

 

뒤늦게나마 어머니의 육성으로 읊은 시를 가족홈페이지에 올렸다. 아들 대신 심었다는 백목련 사진과 시를 쓰게 된 배경도 곁들였다. 반백이 되도록 이제껏 타국에서 사는 그 아들도 이 시를 읽고 목 놓아 울었노라며 어머니께 모처럼 긴 글을 올렸다. 제 아들 역시 타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렸다면서…….

 

문득 어머니의 고달픈 삶이 눈앞에 펼쳐진다. 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채, 당신의 아버지가 시킨 대로 열여덟에 이웃 동네로 시집와서 9남매의 어머니가 된 당신. 학자금 대느라 밤새워 재봉틀을 돌리고 돼지 새끼를 길렀다. 도시로 유학을 떠난 자식이 늘면 돼지 새끼도 늘고 당신의 주름살도 늘었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셨다. 시인이 되셨다.

 

어머니를 닮았으면 앞으로 삼십여 년 넘게 글을 쓸 수 있겠구나 싶으니 신바람이 절로 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마음에 와 닿는 글 한 편을 선물할 날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김향자

전남 고흥 출생.
≪수필과비평≫ 등단(1995).
광주문인협회 부회장·여류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현 광주수필문학회 부회장·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수상 : 광주문학상 외.
저서 : 수필집 ≪개미 발을 밟았어요≫,

                    ≪나도 詩 지어 놓은 것이 있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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