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이 달을 베다
이성룡
이 거리를 헤맨 지 오래도록 가슴은 늘 시리고 아팠으나 달은 왜 내게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가?
불 꺼진 등기소를 지나 평생교육관 담을 스치면서 달에게 묻는다 달아! 달아! 나는 어디만큼 온 거냐?
옛 농업기반공사 골목에 이르러 물어물어 다시 묻는데,
전선이 달을 가르고 있다 달을 베어버린 전선은 이마를 베고 눈을 베고 드디어 온 몸을 무아레무늬로 쪼개버렸다.
성당 쪽에서 뒤따라온 도둑고양이가 내 잔혹한 시체를 물고 담을 넘는다
- 이성룡의 시집 '비자나무 숲에서'(혜지원. 2005)에서
* 시작노트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만큼 왔는가? 어느만큼 더 가야 할 것인가? 묻고 살 것이다.
답이 없는... 그래서 공허한... 그래서 생은 쓸쓸하다.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은 쓸쓸하다.
국토의 변방 소읍 골목 술집에서 거나하게 즐겨 술을 마신 일은 이미 추억이고 집으로 가는 길은 자문하는 시간이다.
바람과 달과 별을 동무로 삼아 등기소 앞을 지나고 평생교육관 담을 홀로 걸으며 그 낯익은 거리에서 나는 낯선 나를 만난다.
아니, 관성이거나 타성이거나 너무 낯익은, 녹음테잎처럼 재생되는 생에 대한 기억상실증으로부터 절절한 반성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람도 달도 별도 나의 원초적인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나의 진지한 상념은 더 처참하게 구겨지고 만다.
마침내 내 눈과 골목길에 어지럽게 걸린 전선과 달이 일치하는 순간, 마치 전선이 달을 채 썰듯이 썰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버렸다.
그러니 약한 호모사피엔스의 몸뚱아리쯤이야 씀벅 베어지지 않겠는가?
앞으로는 상념을 버리고 술집의 여운을 집에까지 데려와야겠다고, 그때 생각했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만큼 왔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그냥 달처럼 바람처럼 흘러가겠다는 것 뿐. 지금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이성룡
1963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했으며, '문학21'을 통해 등단했다.
현재 [들꽃], [침묵]의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출간 시집으로는 『서풍에 밀려온 아프로디테』(리토피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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