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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문학

서동애의 늘 스케치북을 끼고 다녔던 옥자 언니!

by 고흥을 찾아서 2010. 7. 17.

“늘 스케치북을 끼고 다녔던 옥자 언니!”

<土 曜 隨 筆> 수필가 서동애, ‘천경자의 아름다운 82페이지’

 

2004년 가을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구벨기에 대사관을 새롭게 단장한 ‘서울 미술관 남서울 분관’이 문을 열었다. 개관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국내 화단의 대표작가 중 한 명인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었다.
 
나는 그의 작품세계를 만나러 한달음에 미술관을 찾았다. 동향인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다. 80년대 중반에 출판된 에세이집 “꽃과 색채와 바람.”을 시작으로 그가 출간한 책들을 모두 찾아 읽으며 더 푹 빠졌다. 

마음 설레며 들어선 전시장에는 자신의 스물두 살 때를 회상한 초상이나 다름없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가 있었다. 머리에 화관처럼 꽃뱀을 쓰고 가슴에 장미꽃을 단 목이 길어 슬픈 여인상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한없이 고독해 섬뜩하기조차 한 눈망울은 슬프다. 이번 개관 기념전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은 천 화백의 대표적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여인’시리즈와 세계 도처를 여행하면서 화폭에 담은 ‘여행 풍물화’를 중심으로 사십여 점이 전시되었다.

마침 전시장이 한가한 틈을 타 담당자에게 그림 설명을 부탁하니 흔쾌히 받아주어 그의 모든 작품세계를 감상 할 수 있었다.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그가 194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근 60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들로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과 다양한 인물화, 그리고 해외여행을 통해 담은 여행 풍물화 등으로 늘 천화백의 가슴에서 떠나지 않은 것들이며 가장 세인의 관심거리가 되는 주제들이다.

그 중에서도 유독 시선을 끄는 여인의 머리위에 비처럼 쏟아지는 우아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물렀다. 언뜻 보기에 등꽃 같은 노란 꽃잎과 하얀 나비가 어울려 환상을 자아내고 목이 긴 여인의 머릿결이 아름답다.

여인 초상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황금의 비”란 작품은 우수에 찬 눈동자와 오똑한 코와 꽉 다문 입술은 화가와 많이 닮을 꼴이다. 이 작품은 나중에 알고 보니 색조가 은은하면서 연인의 표정에 개성이 있어 책 표지나 기념품 디자인에 많이 쓰였다.

고흥 집에 내려가 있는 동안 천경자 화백이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림의 모태인 고흥군청 주변 마을을 돌며 그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그러나 기나긴 늦봄의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때 까지 들녘에서 돌아오는 나이든 사람들을 붙잡고 묻기를 몇 차례, 드디어 한 할머니께서 천경자 화백인지 모르지만 옥자라는 그림을 잘 그렸던 사람이 이 동네에 살았다 한다.

그가 일러 주어서 찾아 간 천화백이 살았던 집터에는 다른 사람이 새로 집을 살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집주인이 바뀌어 어린 시절 그의 자취를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그가 길어 먹었다는 우물이 지금은 사용을 안 하지만 그대로 있었다.

나는 다음 날 다시 그의 외가였던 팔영산이 바라보이는 점암 성기리를 찾아 먼 친척인 사람을 아는 동네사람을 만났지만 일찍이 고흥읍내로 나온 천 화백에 대한 시원스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모처럼 시간 내어 용흥사에 갔다. 마침 안면이 있는 공양주보살님이 반갑게 맞는다. 법당에 들려 부처님을 뵙고 나오니 그 앞에서 서성이던 그가 따뜻한 차 한잔하고 가라며 옷소매를 끌었다.

보살님이 주는 차를 마시며 문득 그의 친정이 천화백과 같은 동네라는 게 떠올랐다. 예전에 같은 마을에 살았던 또래인 천옥자를 아느냐는 물음에 “아니 규식이 누나를 어떻게 자네가 알아?” 하면서 놀란다.

그에게 천화백의 이야기를 해주자 “그래 옥자 언니 맞아 옥희도 있고 규식이는 남동생이지”. 늘 무언가 그림을 열심히 그리며 아주 얌전하고 말 수가 적어 동네아이들과는 남달랐다는 옥자언니를 회고하면서  어디 사는지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으며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다시 고국에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에, 천 화백의 어머니와 그의 친정어머니들도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고 그 여동생 도 오래전에 죽었다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2006년 3월 갤러리 현대에서 그녀의 전 작업을 결산하는 큰 종합전이 열렸다. 어쩌면 생전의 마지막 전시회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문우인 문 선생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넓은 건물 한 벽면에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에 천화백의 사진이 크게 걸렸다. 현대 갤러리전시관과 영친왕의 생모가 입궁하기 전 잠시 머물었던 두가헌에는 그의 모든 자서전 82페이지가 있었다.

목이 길어 더 슬픈 여인을 만났고, 탱고가 흐르는 먼 이국의 황혼을 감상하며 새색시인 그를 그림 속에서 만났다. 비록 몸은 먼 이국의 병상에 있지만 마음은 이 아름다운 축제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늘 미완성이란 작품으로 미완성의 인생이라는 말을 즐겨 쓰며 완성이라는 것이 있다손 쳐도 그것엔 별반 매력이 없다는 자서전의 글처럼, 그 속에는 꿈이 있어 그 꿈을 향해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며 오붓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그의 인생이 녹아있다.

또한 P 작가는 “꿈을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으며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 그리고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미인도의 진위 논란에 고통을 받은 천 화백은 딸이 있는 미국으로 훌쩍 떠나갔다. 나는 그것이 내내 가슴이 아프다. 그때 그의 분신과도 같은 귀중한 작품 93점을 서울 시립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다행이 위작 논란의 진위가 밝혀져 일단락되었지만 노화백이 입은 가슴에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쉽지 않았던 인생의 고개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 쉽게 식지 않는 예술혼을 잉태한 고향 고흥에 전시관이 개관을 앞두고 있다니, 그는 꿈속에서라도 고향으로 너울너울 날아와 행복할 것이다.

늘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던 옥자 언니, 조용하고 착했던 키 큰 옥자언니를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노보살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82페이지.”를 보던 날 구입한 천 화백의 혼이 담긴 ‘황금의 비’로 제작한 스카프를 다음번 절에 갈 때는 공양주 문보살께 선물해야겠다. 



▽ 서동애 수필가 

전남 고흥 나로도 출생
한국 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
숙명여대 사회교육원 문예창과 수료
순천대 한양대 사회교육원 문창과 수료
백송예술제 용산백일장 수필 장원
월간 순수문학 신인상
한국문인협회회원
한국수필가협회회원
동작문인협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