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고사리
K씨에겐 괴상한 악취미가 있다.
찻집에서 남의 메모지를 몰래 훔쳐보는 못된 버릇이다.
그 괴벽(怪癖)을 추적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직장에서 퇴근을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하강한다.
지하찻집으로 들어간다.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귀가를 서두르는데 그는 찻집에 룸펜처럼 죽치고 앉는다.
그 시각이면 찻집이 굿해먹은 집같이 휑뎅그렁하고 텅 비어 있기 마련.
중년의 여주인이나 두어 명의 아르바이트 여대생들도 텔레비전을 보느라 거짓말 좀 보태서 나무칼로 귀를 베어 가도 모를 정도.
K씨는 커피를 한 잔 시켜서 마시곤 서서히 그 악취미를 발동시킨다.
전화를 거는 척하며 공중전화 쪽으로 간다.
그 옆벽에 붙어 있는 메모판.
거기서 아무 거나 메모지를 하나 뽑는다.
주로 바람맞고 메모를 해 둔 여자의 것을.
그러고는 꽃밭에 불지르듯 괜히 남의 사랑놀음에 질투를 느끼고 심술을 부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바람을 맞힌 바로 그 장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메모를 해서 슬쩍 그 자리에다 꽂아 놓는다.
오늘은 바빠서 못 만나니 R호텔 뷔페 룸에서 ×월 ×일 ×시에 만나자고……
그래놓곤 참기름 같은 웃음을 킥킥댄다.
그 메모지를 보고 R호텔의 뷔페 룸에서 눈 빠지게 기다릴 그 미지의 여자를 멋대로 상상하면서.
그런데 다음날도 퇴근을 하기가 무섭게 지하찻집으로 내려가 커피를 시켜 마신 다음 또 심술을 부리려고 메모판 쪽으로 갔더니,
어럽쇼?
뜻밖에도 이번엔 메모판에 <아무나 보세요>라고 씌어진 괴상망측한 메모지가 하나 턱 꽂혀 있잖은가.
내용이 더욱 기막혔다.
<나는 외로운 여자입니다. 나의 이 외로움을 달래줄 멋진 남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랑의 여신이 미소를 보내어 그런 멋진 남자가 이 메모를 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즉시 429-49××로 전화를 주신다면… 오경숙>
K씨는 이게 웬 호박이냐 싶어 즉시 전화를 걸었다.
예쁜 아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W커피숍입니다.
커피숍? 거기가 찻집입니까?
네, 그래요. 누굴 찾으세요? 지금 바쁘니깐 빨리 말씀해 주세요.
저… 오경숙 씨를 좀…….
기다리세요.
즉시 마이크에 대고,
손님 중에 오경숙 씨, 오경숙 씨 계시면 전화 받으세요 ――라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언제 꽂아 둔 메모지인지, 그리고 혹 누가 자기처럼 장난질을 하려고 이런 메모지를 꽂아 둔 것이나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심심파적으로 한번 해본 전화였는데, 뜻밖에도 오경숙이라는 여자가 그 커피숍에 손님으로 와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금방 들려왔다.
감기라도 들었는지 지독한 코맹맹이소리였다.
"오경숙입니다. 누구세요?"
"아, 저… 메모지를 보, 보고……."
"어머나! 그 찻집에서 저의 메모지를 보고 전화 주신 거예요? 전화 주셔서 고마워요."
"만나서 차라도 한 잔……."
여자가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이내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P호텔로 오시면 안 되겠어요?"
"옛? 호, 호텔 방으로요?"
"아이, 호텔 방이 아니구요, 호텔 뷔페 룸에서…… 거기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어서 그래요."
그러다가 여자가 일방적으로 수정해서 다시 말했다.
"좋아요, 그냥 여기로 오세요. 선생님을 먼저 만나고 가겠어요. 저는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왼쪽 가슴에 달고 있어요. 빨간 장미꽃을 잊지 마세요."
"빨간 장미꽃?"
"네, 그 장미꽃 때문에 저를 금방 알아보실 거예요. 그럼 기다리겠어요."
K씨는 즉시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탔다.
거리는 2월의 추위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택시를 타고 달리면서 그는 빠른 생각에 잠겼다.
어떤 부류의 여자일까.
바람난 가정주부?
과부?
술집 여자?
남자를 유혹해서 껍데기를 홀랑 벗긴다는 세칭 <꽃뱀> 족속?
꽃뱀이라도 좋았다.
잡아먹을 수만 있다면 꽃뱀 아니라 독사라도 좋았다.
제까짓 게 독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쏘냐!
사실 그는 요즘 아내에 대해서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 겨우 결혼 생활 3년밖에 안 되는데도 심하게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아내가 하는 짓마다 미웠다.
그 곱던 얼굴도 두억시니처럼 소름끼치게 미웠고, 말하는 것도 미웠으며, 심지어는 밥 먹는 것, 잠자는 것조차도 미웠다.
그래서인지 만날 새로운 여자 생각만 났다.
싱싱한 아가씨가 아니라도 좋았다.
무조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면 그만이었다.
택시에서 내려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가슴에 장미꽃을 단 여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여자 손님은 아무도 없고, 남자 손님만 몇 띄엄띄엄 보일 뿐이었다.
그제서야 메모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빨간 장미꽃>이라고 씌어진 메모지가 메모판에 보아란 듯이 꽂혀 있었다.
내용을 보고 은근히 화가 났다.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 때문에 더 기다리지 못하고 P호텔 뷔페룸으로 가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달음에 P호텔로 갔다.
택시에서 내려 뷔페 룸으로 들어섰다.
입구 쪽에서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뒤에서 코맹맹이소리로 말했다.
"오경숙 씨를 찾아오셨나요?"
홱 뒤돌아보니 오오, 거기엔 뜻밖에도 아내가 서 있지 않은가.
그 왼쪽 가슴에서 액세서리 장미꽃 한 송이가 무슨 생명의 눈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변성을 내려고 그랬던지 한 손으로 코를 쥐고 있었다.
그 손을 내리면서 아내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언젠가 술에 취하셨을 때 찻집에서 남의 메모지를 훔쳐보는 재미로 요즘 산다고 하셨죠? 그러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구…… 당신의 그 스트레스를 오늘은 제가 풀어드리고 싶었어요. 스트레스 좀 풀렸어요? 그럼 고맙다는 뜻으로 뷔페나 사 주세요."
그 선량한 아내의 눈에 고요히 고이고 있는 눈물의 의미를 K씨는 모르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의 유태인 격언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선량한 아내를 둔 남자이다>
고사리(高士里) - 소설가
전남 고흥군 쑥섬에서 출생.
65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신춘문예(박영준 선생 심사)와 『월간문학』신인작품상 수상으로 문단에 나온 고사리는 지금까지 작품활동만 해 온 몇 안 되는 전업작가로서, 주로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의 양면성을 파헤치는 소설을 즐겨 쓰고 있다.
<<현대문학>>의 <바보들의 나라>와 <이른비 늦은비>, <<펜문학>>의 <인간 게놈>, <<월간문학>>의 <鳥有先生>, <방화(放火)>, <공수래 공수거(중편)>, <<한국소설>>의 중편 <여론>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장편소설로는 <<적자생존(전2권)>>, <<가짜의 가짜>>,<<빨간 모자(사건25시 주간신문 연재중)>>, <<삼국지(전5권)>>, <<산사태>>, <<토끼는 원숭이의 궁둥이를 싫어한다(이노블타운에 연재중)>> 등이 있고, 문화관광부 한국문학 창작기금 1천만 원 지원 창작집 <<살아 있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전쟁문학상, 크리스천문학상, 한국기독교문화예술대상(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방송대 국문과, 안양대 신학대학원, 하와이 인터내셔널대 신학대학원(M.Div).
국제펜클럽, 문인협회, 소설가협회, 희곡작가협회, 방송작가협회, 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활동중이다.
'고흥관련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은일의 딱국질 (0) | 2010.07.18 |
---|---|
정유영의 흔들리는 성(性) (0) | 2010.07.18 |
정조의 '모본단 옷감 한 벌' (0) | 2010.07.17 |
서동애의 늘 스케치북을 끼고 다녔던 옥자 언니! (0) | 2010.07.17 |
성종화의 고흥반도를 다녀 오면서 (0) | 2010.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