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小鹿島) 가는 길
유성규
노을이 뚝뚝 지면 너는 또 서러운 문둥이
시메나루 강(江)을 건너 이름 석 자 남겨 놓고,
멀건 달 무주 공산(無主空山)에 발가락도 묻어 놓고.
어디를 가려 한다 천명(天命)을 가려 한다.
눈썹을 빼간 바람 네가 좋아 사느니.
잉잉잉 눈물 말리는 소록도(小鹿島)를 가려 한다.
조막손 고운 문둥 은전 한 닢 빠뜨렸네.
햇살이 하두 고와 신앙(信仰)처럼 반짝이네.
그 신앙 결이 고와서 그냥 두고 떠나네.
아직은 밉지 않은 밭두렁을 베고 누워,
불개미떼 따돌리고 다시 쩔룩 고개 너머
천형(天刑)을 등에 업고서 쩔룩쩔룩 남도(南道) 간다.
작가 소개
유성규(柳聖圭 1931- ) 시조 시인. 좌절을 초극하는 성실한 인간의 모습을 한국적 토양 위에 형상화시켰으며, 잡지를 만들어 시조 생활화 운동, 전통 문화 운동에 앞장섰다. 시조집으로 <동방 영가(東方靈歌)>, <섭리 곁에서> 등이 있다.
어휘 풀이
무주 공산(無主空山) : 임자 없는 빈 산
조막손 : 손가락이 없거나 오그라져 펴지 못하게 된 손
천형(天刑) : 천벌(天罰). 하늘이 내리는 벌. 여기서는 나병(癩病)을 뜻함
핵심 정리
갈래 : 평시조. 연시조. 현대 시조
율격 : 외형률
성격 : 운명적. 긍정적. 초월적
어조 : 커다란 시련 앞에서도 모든 것을 인정하는 다정한 목소리
서정적 자아 : 문둥병에 걸렸으면서도 그러한 운명을 긍정하고 달게 여기며 떠나는 존재
표현 : 모든 것을 긍정하는 듯한 내면의 심리가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구성 : 장별 배행
제재 : 소록도 가는 길
주제 : 버림받고 떠나는 문둥이의 아픔과 그것에 대한 극복
이해와 감상
인간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이 잘리우고,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며 자신의 죽어 감을 눈으로 확인하는 문둥병만큼 커다란 시련과 아픔도 없을 듯하다.
‘노을’이 질 때, 문둥이는 유배의 땅 소록도로 떠난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세상의 모든 것, 제 ‘이름 석 자’도, ‘발가락도 묻어 놓고’ 그는 떠난다. 그런데 세상이란 따지고 보면 주인이 없는 곳이기에 아무 미련도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족과 친지와의 생이별, 벗들과의 헤어짐 속에서도 이제 그는 ‘운명’을 친구로 맞이한다. 그리고 ‘미련’처럼 지니고 있던 ‘은전 한 닢’마저 빠뜨렸을 땐,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그의 모습은 ‘신앙’이 되고,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것을 그 세상에 남겨 놓고, 이제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기뻐하며, 자신이 죽어 돌아갈 ‘밭’을 어머니의 무릎처럼 ‘베고 누워’ 본다. 그리고 문둥병이란 ‘천형’마저 아이처럼 ‘등에 업고’ 떠나는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남는다.
각 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연에서 ‘노을’을 ‘가을’과 ‘저녁’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죽음’을 의미한다. 문둥이는 세상을 등지고 떠나가고 있다.
2연에서 문둥이는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보아 주지 않았지만, 그러한 것을 이제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시련을 주었던 ‘바람’을 벗으로 대할 뿐이다.
3연에서 문둥이은 아무 가진 것 없이 그냥 떠나가고 있다.
4연에서는 아픔과 설움도 다시 그를 괴롭힐 수 없도록 따돌리고, 단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떠나가고 있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천형’을 아이처럼 ‘등에 업고서’ ‘소록도’, 그 유배의 땅으로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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