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중에 배꽃이파리 하나
유금호
옛 친구를 담은 관이 완전히 땅 속으로 사라지고, 평토제(平土祭)가 끝날 때까지 나는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산마루 왼 쪽에 작은 마을이, 오른 쪽으로는 낮은 등성이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마른 잔디와 새 흙으로 빚어진 새 무덤 뒤 엉성한 활엽수들 사이로 새빨간 단풍의 교목 두어 그루가 잠깐 시선을 붙들었다.
“용구까지 가뿌렀구만. 인자.”
1회용 컵에 소주를 채워 내 앞에 내민 병태의 눈도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내가 눈짓으로 잡목들 사이 벌건 단풍을 가리켰다.
“옻나무 아녀? 저거 개옻나무구먼.”
설핏 병태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환장하겄구만. 저 놈이 저승 가서도 저걸로 피리 맹글어 불고 다닐라고 생각한 거 아니여?.... 헌디 누가 따라가서 맹글어 줘야제. 용구가 지 손으로는 못 맨들텐디...”
“인제 저도 혼자 만들어 불 줄 알게야.”
무슨 장난들을 그렇게도 심하게 했을까.
“그놈의 옻나무피리 땜에 부지깽이 두 개가 부러지게 직살하게 맞았는디....”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바다 쪽으로 눈을 던진 친구의 염색한 머리칼 아래 부분이 먼지를 뒤집어 쓴 듯 희부연 하다.
“옻나무피리, 용구 새끼가 불어 갖고 주둥이에 옻이 올라 돼지주둥이가 다 안 됐나?......거기다가 그 손으로 오줌을 눠서.......”
“저희 아버지 것보다 용구고추가 더 커졌다고 지 엄마 우리 집으로 쫓아 온 거 생각나. 그날 저녁.”
. “나만 직살하게 맞았다니께. 그 새끼 좆 땜에.”
무덤 건너편 메마른 밭이랑에는 친구를 산 위로 태워왔던 상여의 잔해가 아직 다 타지 않아 연기를 높고 길게 뽑아내고 있었다. 그 연기가 올라가다가 흩어지는 초겨울 하늘에 말똥가리 한 마리가 여유롭게 날고 있었다.
어쩌다 고향에 들리면 멀리서 용캐도 알아보고는 투박하고 우악스러운 손으로 부둣가 횟집으로 끌고 가서, 막 소주 한 잔씩을 맥주 컵에 채워 그걸 마시고 난 다음에야, 언제 왔능가? 사업 잘 되제? 신수가 좋아 보이네, 히죽 웃던 그 선량한 눈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쓸쓸했다.
“요새 아그들 빰치게 우리덜 장난 너무 심하게들 했제......인자 지 타고 온 상애(喪輿) 불질러 부렀응께 용구 놈, 이 산에서 내려가긴 틀려 부렀네.”
병태의 눈에서 기어이 주루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놈의 자식 같이 있자고 붙들기 전에 우리도 내려가지. 이제.”
“앞에 간 놈들 만나서 놀겄제. 인자부터는...”
고향이란 것이 언제부터 부음을 받고 찾아오게 된 그런 공간이 되어버렸을까.
녹동(鹿洞)이라는 이름의 남쪽 작은 포구(浦口).
통통배로 10분이면 소록도(小?島)로 건너갈 수 있어, 여름철이면 관광객이나, 종교 단체들 손님도 최근에는 꽤 많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소록도에 가려면 녹동에서 철선에 승용차를 옮겨 싣거나, 차를 세워두고 배를 타야해서, 주민 수효에 비해 꽤 많은 횟집이며, 식당, 찻집들이 타지 손님들을 겨냥해서 바다 쪽을 향해 문을 열고 있다고 했다.
어렸을 적 친구 몇이 어업이나, 상업, 가까운 농촌에 남아 있어, 내가 고향에 내려가면 그 들 중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이른 아침에도 반가운 사람을 보면, 인사 나누기 전 됫병 소주를 맥주 잔 그득 따라 한잔씩 마신 다음에야, 안부를 묻는 그곳 습관은 전혀 변함이 없는데다, 바다를 끼고 사는 사람들은 감정 표현이 직설적이어서 외지 사람들에게는 그곳 포구의 정서가 당혹스러울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여름철 태풍이나, 해일, 도시와 떨어졌다는 소외감들이 그런 기질을 만들었겠지만 레슬링, 권투, 씨름 선수들 중에도 그곳 출신이 많을 만큼, 사람들 체격도 커서 외지 사람들의 그곳 인상은 더 투박하고 거칠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점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들도 지인의 부음을 받거나, 부모 산소 일에나 찾게되는 고향 땅이, 유년을 지낸 친구들까지 하나, 둘 사라져가면서 아주 낯선 공간으로 변해버릴 것 같은 예감에 쓸쓸한 기분이 된다.
“지놈이 우리 죽으먼 염(殮) 해 준다더니, 지놈이 앞에 가네.”
봉고 차에 시동을 걸면서 병태는 산등성이에 두고 내려 온 용구 무덤을 되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상상 해본 적도 없었는데, 용구가 장의사가 되어 있었다.
부모 산소를 합장하고, 일찍 죽은 동생의 뼈를 날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고향 친척과 상의를 하다가 내 친구가 바로 염쟁이가 된 걸 알고 느낀 황당함이라니....
중 고등학교 시절, 담력을 기른다고 마을 공동묘지의 돌무덤에서 해골들을 꺼내 오곤 하던 장난 생각이 나서, 다, 옛날 진 빚 갚음하느라 네가 장의사가 된거라고 이야기했다가, 그럼 늬는 언제 개업할기고? 하는 바람에 한참을 같이 웃어댔던 것이 3년 전이었다.
그런 그에게 부모님 합장 일을 부탁하고, 동생 일까지 부탁하면서 인생은 참으로 예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포구에서 1.5km 정도 떨어져 바다 쪽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내가 태어난 과수원이 지금도 있다.
여러 해전, 주인도, 과일나무 수종도, 땅의 형질도 달라졌지만 도로변에서, 계단식으로 된 언덕과 탱자나무울타리가 눈에 들어와서 나는 그 곁을 지나갈 때면 잠시 유년의 기억으로 빠져들곤 한다.
언덕과 늙은 배나무 가지 사이, 탱자 울타리에는 산새들이 봄이면 둥우리를 많이도 만들었다. 그때 친구들과 훔쳐보았던 둥우리 속 작은 산새 알 껍질의 기하학적인 점이나 선, 먹이를 달라고 제 머리보다 훨씬 크게 입을 벌리던 새끼 새들의 울음소리는 세월과 관계없이 지금도 선명하다.
우리 과수원의 위치에서 오른 쪽 산 이름이 비봉산이었다.
4부 능선에서 7부 능선 사이가 돌밭이었는데, 주변 마을에서 아이들 주검이나, 결혼 전 죽은 송장을 나무로 된 관 대신 항아리에 앉혀서, 그 돌밭에다 돌로 쌓은 돌무덤을 만들었다.
뒷날 교수 노릇하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너무 일찍 죽은 영혼들을 빨리 이승으로 환생하도록 하는 염원이 자궁을 닮은 둥근 항아리에 앉아 있는 자세로 장례 지내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철없던 때, 낮에도 사람이 잘 가지 않는 그 돌무덤을 한 밤중에 찾아가 돌 더미를 헤치고 허연 두개골을 꺼내오는 장난들을 했다. 이 나라 의학 발전을 위해 의대생들에게 사람 뼈 표본을 제공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그런 장난을 했는데, 실제 같은 집에 하숙하던 의대생에게 두개골을 선물하고, 중국 집에 가서 탕수육과 배갈을 얻어먹은 기억도 있다.
“내 고향 돌아 와서 좋은 일 많이 했다 아이가? 내가 저승 옷 입혀 준 송장만도 이 백 명은 넘을기구만.”
3년 전, 장의사 간판을 내건 용구를 참 오랜만에 만났다.
“젊은 혈기에 배를 탄기라.... 선원들이 전부 경상도 문디이 들만 있어갔고, 나도 그쪽 말이 입에 배어 버린게라.....배 내려 갖고는 한참 부산서 살기도 했고..... 고향 와서 할 일이 또 뭐가 있노? 그래 이 일을 시작한기라.....이장(移葬)도 많이 해주었제.... 묻은 지 10년 넘은 송장이 하나도 안 썩고 있기도 하는기라. 지, 부모 송장이라도 자식들은 질겁을 안 하나? 그래 나는 이장할 때, 자식들 처음에는 옆에 몬 오게 한다. 안 썩고 있는 저희 애비, 에미 송장보고 기분 좋을 자식이 어디 있노? 뼉다귀만 추려 한지에 싸고는 살점은 그 자리에서 뜯어 묻어 버리는 기제.... 어떤 송장은 늬 명태 알제? 살이 명태같이 말라붙어 갖고 영 뼉다구를 뜯어낼 수가 없는기라. 할 수 없제. 낫 같은 것으로 살점을 훑어 내제. 그래서 자손들은 파묘 끝나기 전까지 저쪽 아래에서 가만히 기다리라고 하는기라. 좋은 자리, 뼉다구 노랗게 온전히 있는 것은 자손들보고 직접 모시라고 하지만도 요새 사람들, 저희 부모 뼉다구라도 성큼 손을 댈라고 안 하더라고..... 국민학교 2학년땐가 우리 담임 생각나제? 신 선생님. 와, 말대가리 선생님 안 있었나? 그 사모님 돌아갔을 때도 내가 염을 해 줬다. 그게 선생님한테 내 부조가 될 것도 같고 해서..... 간으로 죽은 사람은 열이면 일곱이 배에 복수가 찬다. 그래서 입관을 할라하문 배불뚝이가 되어 가지고 관 뚜껑을 덮을 수가 없는 기라. 늬 같으면 그때 어떻게 하겄나? 식구들 다 내 보내고, 병풍 뒤에서 대 꼬챙이로 그냥 배를 푹 찔러 바께스에다 썩은 물을 받아 낸다.... 늬 송장 썩은 냄새 잘 모르제? 나도 첨엔 여러 번 코피 쏟았다.”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잔을 앞에 놓고 용구는 무용담처럼 송장 다루던 이야기를 밤늦게 까지 들려주었다.
“장난들을 너무 했어.”
정말이지 무슨 장난들을 그렇게도 지독하게 했을까.
뱀을 산채로 가죽을 반만 벗긴 뒤, 여자 애 사는 집 대문에 걸어 놓고, 그 애가 대문 나오는 것을 기다리기도 했고, 겨울철 밭 두렁 쥐구멍에다 불을 피워, 신주머니로 산채로 쥐를 잡아 화형을 시킨다고 쥐에 석유를 뿌려 불을 붙였다가 불붙은 쥐가 벼 낟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벼 낟가리가 홀랑 불타던 일, 외딴 집 새끼돼지를 훔쳐 오다가 꽥꽥거리는 바람에 팽개치고 신발까지 잃고 도망 온 일 같은 건 그래도 약과였다.
용구는 비봉산 돌무덤에서 꺼내온 해골바가지 속에 손전등을 집어넣어 마을 어귀 팽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놓았다가, 새벽시장 채소 팔러가던 동네 부인네 한 사람을 기절까지 시킨 소동도 있었다.
겨울 날 손전등을 들고 동네 초가 지붕에 참새 잡는다고 올라갔다가 떨어져 절름거리며 다닌 일이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물총새를 잡는다고 절벽 흙 구멍에 손을 밀어 넣었다가 왕지네에 물려서 내 손가락이 아버지 손가락 보다 훨씬 크게 퉁퉁 부풀어올랐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그 지네 독을 빼낸다고 닭똥을 손가락에 싸매고 한 밤을 새우면서 맡았던 그 지독한 냄새라니....
세월의 밑바닥 속에 그런 기억들이 아슴하곤 했는데, 고향에 오면 그것들이 뒤섞이고, 얼마큼은 각색되어 스멀거리며 살아 일어나는 거였다.
봄철에 버드나무 가지가 물오를 때를 기다려 열 개고, 스무 개고 버들피리를 만들었다. 왜 그토록 많은 버들피리를 만들었을까. 피리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영 소질 없는 아이들이 있었다. 용구가 그런 애였다.
너, 저 옻나무 가지로 피리 두 개만 만들어라. 집에 있던 면 장갑을 가지고 나와서 내가 병태에게 시켰을 것이다. 병태가 맨손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옻나무 가지로 피리가 만들었고, 우리는 그것을 풀밭에 놓아 둔 채, 신나게 버들피리를 불어 댔다. 굵은 가지로 만든 것은 낮은 소리를 부웅하고 냈고, 가는 가지로 만든 것은 삐이익 소리를 내었다.
피리 만들기에 영 소질이 없는 용구가 뒤늦게 우리 곁에 와서 부러운 눈으로 한참 우리 눈치를 보다가, 볼펜 두 자루 새 거 있는데........주춤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선심 쓰듯 볼펜 한 자루씩을 받아 넣고, 눈짓으로 풀밭에 놓인 피리를 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게도 옻나무 가지로 만든 피리에서는 우리들 버들피리 보다 더 맑고 높은 소리가 났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병태와 나는 언덕을 구르듯 뛰어 내려오고, 그때쯤 해가 지면서 바닷물이 벌건 색으로 일렁이기 시작한다.
그날 밤 용구 어머니의 칼칼한 목소리가 부엌 쪽에서 들려 왔을 때,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숨소리를 죽이느라고 땀을 흘려 댔다. ...내가 안 그랬다니깐. 나는 알지도 못해.....병태가 풀밭에다 내버린 거라니까.... 나는 용구가 그걸 집어 가는 것도 안 봤다니께 그러네,......
용구 자지가 즈네 아부지 자지보다 더 커졌대. 이튿날 병태는 제 어머니에게 부지깽이가 두 개나 부러지게 얻어맞고 와서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옛날 우리 과수원 쪽으로 한바퀴 돌아 내려가면 안될까?”
“자네 자주 올 것도 아니고, 말 안해도 그리 돌아갈라 했네. 거그도 인자는 다 변해 부렀어.”
친구의 탈색된 머리칼 뿌리 쪽이 유난히 더 시선을 붙잡는다.
“나무도 배나무 다 파내고 유자나무로 싹 바꽈 심었드먼.... 사시사철 푸르게 있는거이 꼭 좋은 것만 아니드랑께...”
끈적이는 기억의 안개 너머로 나는 창 밖 멀리 보이는 바다 쪽에 눈을 주었다. 천천히 어둠이 시작되는 저녁 하늘은 지금 막 붉은 색으로 변해 가면서 바다색깔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동생이 바로 고향 바다에서 죽었다.
형들이 수영 솜씨를 자랑하느라 남의 고기잡이배를 바다 가운데로 저어 나가다가 배를 버린 채, 해안으로 헤엄치고 하던 것을 흉내 내려 했었던 듯 싶다.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가. 바다 한 가운데로 노를 저어 나가다가 노를 멀리 던져 버리고, 저마다 죽지 않기 위해 바닷가로 기진맥진 헤엄쳐야 했던, 여러 번 눈앞이 아득해지던 그런 놀이를 우리는 여름철이면 무슨 행사처럼 치뤘다.
노를 집어던지고 바다에 뛰어 들 순간을, 자존심 때문에 아무도 앞서 제안하지 않은 채, 해안은 점점 아득해지고, 두려움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때 우리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며 침묵했다. 그러다 한 순간 위기감이 공동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노를 힘껏 내던지고 배를 버린 채 바다에 뛰어 들어 해안으로 향했다.
동생이 죽고 나서야 우리는 그 놀이를 중단했다. 동생의 죽음을 알고 나서 우리는 짐작했던 것이다. 어른들은 열 다섯 살 된 사내자식이 수영을 하기에는 아직 차가운 6월초에 바다에 들어갔다가 왜 죽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동생은 우리의 그 위험한 놀이에 이번 여름에는 멤버로 참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해 여름, 형들이 그 고약한 행사를 시작하기 전 연습을 하고 싶었을 터였다..... 발에 쥐가 난 모양이여. 그게 아니고 심장마비여. 마을 사람들은 놋대접에 막 소주를 흘러 넘치게 따라 마시며 그렇게들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그날 왜 작은 배 한 척이 밧줄이 풀려 노까지 잃은 채, 사람도 안 사는 바위섬에 밀려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여름이면 닻 풀린 배가 엉뚱한 해안이나, 바위섬으로 흘러간 적이 더러 있었는데도 어른들이 그 일을 역시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20대의 우리들 추억 속에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인 치기 어린 장난들에 그 당시는 모두가 관대했던 것일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더벅머리들 주제에 그 작은 항구의 선술집들을 100주회를 한다고 떠들고 다녔어도 어른들은 그냥 우리를 못 본 척 했다.
술꾼이라면 100가지 다른 종류 술을 섞어 마셔야하는데, 100종류의 술을 구하기가 힘드니까, 적어도 100개의 술집을 순례해야한다는 그 되잖은 주장을 꺼낸 건 나였을까, 아니면 병태였나, 용구였나.
호주머니에 왕소금과 볶은 땅콩을 한 웅큼 넣고 다니면서 아무 집이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여기 술 한잔씩 주슈. 안주 필요 없고요. 소주 한 병, 막걸리 한 되가 아니라, 한 잔씩의 술을 주문하는 총각들이 귀찮았겠지만 그때는 왕대포라고 한잔씩의 술을 팔 때였으니까, 소주건 막걸리건 우리 앞에 한잔씩의 술이 놓인다.
우리는 천천히 호주머니 속의 땅콩이나, 막걸리의 경우 왕소금 몇 알을 안주로 해서 떠들어 가며 술을 마신다. 인생이, 청춘이, 정치 현실이, 민주주의가, 역사와 예술이, 땅콩과 소금 안주의 그 술자리에서 여과 없이 휭휭 날아다니고, 우리는 순례자가 되어 또 그 옆집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두어 명이 돼지고기 찌개에 소주를 마시는 뱃사람 곁에 앉았다가, 우리 여기 사람 수대로 왕대포 한잔씩. 하는 순간 찬바람을 일으키며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고, 우리 중 누구 하나가,.... 씨팔, 우리는 뭐 손님 아니야? 큰 소리를 내어 뱃사람들하고 멱살잡이로 이어지고, 결국 주인 아주머니가 화해술을 한잔씩 따라준 다음에야 우리는 또 다음 순례지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병태의 봉고 차가 옛날 계단식으로 되었던 언덕을 다 뭉개 없애버린 옛날의 우리 과수원 곁에 잠시 머물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과수원이 다 변해버려서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우리 동창들은 자네가 서울서 돈 많이 벌어 과수원을 도로 사먼 좋겄다, 늘 그리 말하고 했제...”
포구로 나가는 꾸불거리는 산길을 작은 자갈들을 튀기고, 털털거리면서 5분 여를 달리다가 길가에 다시 차가 잠시 섰다.
2, 3분만 더 달리면 이제 바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점이었다.
내 기억의 한 자락에 늘 같이 있던 친구, 용구는 이제 유년의 인연마저 자유롭게 출생이전의 순수 존재로 환원했을 것이다.
내가 사념에 젖어 있는 동안 병태는 길 바로 위 비탈을 올라 작은 무덤 앞에 들고 왔던 소주 한잔을 따르고 있었다.
무덤 주변으로 보라 빛 들국화 무더기가 어스름 속에서 시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누구?”
그가 차에 시동을 다시 걸었을 때 내가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가 누구의 무덤이라고 가르쳐 준다해도 3,40년의 세월, 별로 내왕이 없던 내 고향 땅에서 태어나고, 죽어 갔을 무수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옛날 100집을 돌아다닌다고 헤매던 그런 대포 집들 이젠 없지?”
“비슷한 술집도 없지 싶다. 세상이 다 바뀌어 부렀다.”
하기야 그 무렵 몇 집이나 돌아다녔는지는 모르지만 100집을 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십 여 곳을 순례하고 날 즈음이면, 나는 물에 빠져 죽은 동생 생각에 울적해졌고, 누군가는, 암만해도 울 엄마 다시 못 일어날 것 같다. 그러면서 울먹거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두로 나가 바다를 향해 한꺼번에 오줌을 내갈기면서, 야. 늬가 젤 쎈데. 아니다. 용구게 제일 멀리 갔어. 임마, 그게 다 옛날 옻나무피리 덕인 줄 알아라. 그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잠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 위 성당 쪽을 잠시 숙연한 기분으로 올려다보았다. 성모 마리아도 멘스를 했을까. 멘스...... 얌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 넌 어째 생각하는 게 항상 그쪽이냐?......조금 침묵이 흐르고 나는 다시 일렁거리는 밤바다 멀리 그 어둠 속에서 내 동생이 인어들 속에서 수영하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나는 문득 얼굴이 하얗던 선술집 여주인을 떠 올렸다.
이름이 연지라고 했던.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느낌은 바바리 코트를 입은 기억 때문이다. 혹은 가을이었지만 비가 뿌려대기 시작해서 스산한 기분이 드는 그런 저녁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잔에다 줘요.”
내가 코트 호주머니 안쪽에서 며칠 전 공동묘지에서 주어 온 두 개골 조각을 꺼내 들었고, 친구 중 누군가가 킥 웃음을 터뜨렸다.
알전구 아래 내 휴대용 술잔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여주인이 비명을 지를 거라는 기대가 그날 그 선술집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술잔 좋지요?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누군가 거들었지만 여인의 표정에는 아무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인은 왕대포 잔에 술을 따르듯 내가 내민 두개골 조각에 표정 없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고, 친구들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휴대용 잔을 내밀면 따라 주겠다는 심상한 그런 얼굴이었다. 나는 오기를 부리듯 그 두개골 조각에 담긴 막걸리를 단숨에 비우고 그녀 앞에 내 휴대용 빈 잔을 내밀었다.
“아주머니도 이 잔으로 한 잔 해요.”
“그러지요.”
여자는 설핏 웃어 보이고 내가 따르는 술을 스스럼없이 받아 마셨다.
우린 순간 이때까지 취해 왔던 술기가 한꺼번에 달아나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여자에게서는 이상하게도 늦가을의 달빛 분위기가 풍겼다.
시골 해변가 선술집 여자 같지 않게 그녀는 흰 피부에 서늘한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눈의 흰자위가 푸른빛을 내고 있어서 더욱 그녀를 달빛에 젖은 듯한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게 했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전혀 표정 없이 곧바로 자기 일상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맥이 풀려 곧바로 그 집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여자의 여동생이 있었고, 그 여동생 이름이 민지라는 것은 며칠 후에 안 일이었다.
지독했던 사라호 태풍이 지나고 난 뒤 그해 우리 배 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봉지 속 배 열매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잎사귀와 가지들 역시 참혹하게 꺾여져 흩어졌다. 배 봉지를 만들었던 신문에 인쇄된 서양 여자 얼굴과 영어 글씨들도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찢겨나간 잎사귀에 섞여 땅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래도 나무 뿌리는 남아 있다. 그때, 음울하긴 했지만 아버지 말씀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아 있다. 그렇게 혹독한 여름을 지나면 가을이 되어 몇몇 배나무는 배꽃을 피운다. 내년에 피워야 할 배꽃이 잎과 함께 벌거벗은 가지들을 일부 채우는 것이다.
심한 태풍은 그래서 연 2년의 과수원 농사를 망쳐버린다.
그러나 그해의 가을 배꽃.... 원래 다른 꽃보다 배꽃은 푸른색이 돌만큼 흰빛이어서 이상한 차가움을 풍긴다. 더구나 초가을 싸아하게 피부에 와 닿는 냉기 속의 배꽃은 푸른빛이 더욱 선명하게 전해진다.
그날 해질녘 나는 군데군데 피어난 가을 그 배꽃 속을 서성였다. 그러다 마른 풀 냄새를 맡으며 팔베개를 하고 잠시 잔디에 누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생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한참 빠져 있던 미시마 유끼오와 장 쥬네의 소설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배꽃 냄새가 아득하게 풀 냄새에 섞여들었는데 배꽃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섬뜩한 차가움을 볼 가까이 느끼며 눈을 떴다. 배꽃 같은 서늘한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방해했나 봐. 하르르 배 꽃 이파리들이 떨어져 바람에 날려 왔다.....그대로 있어. 그냥. 어머니가 이것 한잔 가져다주라던데....여자의 희고 가는 손에 작은 술병과 잔이 하나 들려 있었다.
어머니가 복숭아로 술을 담구었다고 자랑했던 기억이 났다.
여자가 잔에 술을 따라 내게 내밀었다.
그 술잔 위로 배꽃이 나비 떼처럼 날더니 이파리 하나가 술 잔 안으로 내려앉았다.
그 마른 잔디 위에 어떻게 해서 같이 쓰러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순간 나는 뱀에게 휘감긴 개구리 꼴이 되어, 안돼. 그렇게 중얼대며 아득하게 풍겨 오는 배꽃 냄새를 들어 마셨다. 여자의 손이 내 맨살을 스치고 지나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잠시 망연한 상태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일어나 앉았다.
그때 그녀 흰 적삼 어깨 부분에 작은 붉은 반점이 보였다. 그 반점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피가.....”
내가 소스라쳐 그녀 어깨를 살폈다.
그녀가 잠깐 누웠던 잔디 위, 어깨가 놓였던 자리에 하얀 사기 그릇 조각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누워 있었다.
여자는 그 사기 조각을 집어 멀리로 던졌다.
핏물이 훨씬 넓게 등으로 번졌다. 그때 마침 서쪽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어서 어깨 위 핏물이 노을에서 묻어 나온 것 같은 착각을 잠시 주었다. 핏물 색깔 때문에 배꽃 이파리들이 나비 떼처럼 날고 있는 배나무 가지 사이, 서쪽 하늘 노을로 둘은 눈을 같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바람 한 자락같이 하늘의 노을만 남겨 놓고 내 곁에서 스르르 빠져나가 버렸다.
그런데 왜 나는 하늘거리며 날아 내리는 배꽃 이파리가 나비 같다고 생각했을까.
민지라는 여자에게 어린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그 후 들은 일이었다.
그 여자 아편쟁이래. 그래서 남편에게 쫓겨나 언니에게 온 거라는데...친구 중 누군가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상추쌈 대신 양귀비 잎으로 밥을 싸먹는 걸 본적이 있다고 다른 친구가 말했다.
나와 같이 밥을 먹은 적은 없지만, 그 여자가 몇 번 어머니와 마루에서 점심을 같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무렵은 식사 때 과수원에 들른 마을 사람들이 곧잘 마루에서 어머니와 어울려 풋고추나 상추쌈으로 점심을 한끼씩 때우고 했었다.
과수원 울타리 한 쪽, 열 포기 남짓 하늘거리는 빨간 꽃을 피우는 양귀비가 심어져 있었다. 농촌에서는 집안에 더러 몇 그루씩 양귀비를 심었고, 줄기를 통째 말려 두었다가 여름날 배탈이 나면 비상약으로 줄기 삶은 물을 마신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점심때 우리 집에서 그 양귀비 잎으로 밥을 싸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 우리 과수원에 들렸다가 사라지곤 하던 그 여자의 모습을 언제부터인지 더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무렵, 그 연지네 아주머니네 대포 집에 들렸을 때는 우리들의 술기가 말끔히 가셔 있었거나, 허튼 소리들이 사라져 버렸던 것을 기억한다.
차가 산길을 돌아 부두 쪽으로 꺾어졌을 때 내가 차를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아까 그 무덤, 연지 아지매 무덤이여. 용구가 더러 벌초를 해 주었제....”
내 짐작으로 그 연지 아주머니네 선술집이 이 부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차를 내리자 내 기분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 동안 세월로 그녀나 그녀 동생 역시 이미 죽었거나 파파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혼자된 아편쟁이 여동생한테 애가 하나 있었는디, 고것이 문둥병이 걸렸다 안 하는가....고걸 소록도로 보낼라고 여그로 데려 왔던 모양인디...연지 아지매가 집에다 두고는 사람 고기를 삶아 멕여 고쳤다는 소리가 있었어.”
“사람 고기를?”
“아, 우리 어렸을 때 문둥이가 애기들, 간 빼 먹는다고 안 그래 쌓는가? 참말인지는 모르제..... 비봉산에 애기 송장 뉘어놓고 왔다하먼... 연지 아지매하고, 동생이 그 밤에 가서 애기 송장 다리 하나씩을 짤라다 삶아 멕였다는 것이여.”
“설마?”
“애기 병이 나았는지, 죽었는지 모르지만 몇 달 후에는 그 아편쟁이가 없어져 불고, 연지 아지매도 술집 문을 닫아 부렀어.”
물새들의 끼루룩대는 소리와 함께 내가 꿈속에서 더러 보았던 흰나비 떼가 배꽃이파리에 섞여 머리 속을 눈발처럼 날기 시작했다.
괜찮아? 자네 괜찮은 거야? 병태가 내 입 속에다 청심환을 으깨어 밀어 넣으며 어깨를 흔들어 댔다.
“아, 아무렇지도 않아. 갑자기 너무 빨리 마셔서 그래.....”
나는 냉수를 벌컥거리며 들이키고 나서, 비틀대며 횟집을 나와 소록도가 건너다 보이는 방파제 위에 걸터앉았다.
“옛날 그 해골 술잔에다 소주를 한잔 따라 마셨으면 좋겠구만도.......그러구 나서 옛날 연지 아주머니네 술집에 한번 가보기도 하고.....”
바다 건너편 소록도의 울창한 수림의 윤곽이 침엽수 사이, 헐벗은 활엽수들로 예비군복 같은 얼룩을 이루고 있더니, 금방 저녁 하늘 색깔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숲과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려갔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 동생의 영혼은 지금 어디쯤 머물고 있을까. 내 아버지는, 또 어머니는.... 연지 아줌마나 아편쟁이였을지 모르는 동생, 민지라는 여자는 또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옻나무 피리 때문에 돼지주둥이가 된 내 친구, 용구는 자기를 태워갔던 상여를 불 태워버려, 비봉산 중턱 제 무덤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꼼짝 않고 누워 있는 것일까.
나는 종이컵에 소주를 그득 따라 방파제 위에 올려놓는다.
초겨울 냉기 속에 별이 떠올라 오기 시작했다. 그 별들이 바다 위로도 똑같은 수효로 떠오르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보았다.
바다위로 떠오르는 별이라니....어렸을 적에는 이 방파제에 서서 누구의 오줌이 더 멀리 나가는가를 시합했는데.... 오줌 줄기를 조금이라도 더 멀리 보내기 위해 막걸리를 마시고 오줌을 참고, 또 참아서 끝내 아랫배가 터질 지경이 된 다음에야 오줌줄기를 쏟았던 그 치기 어린 세월은 어디로 숨은 것일까. 생각하면 유년의 기억들이란 상당부분이 공통분모를 이루고 있어 세월의 무게와 함께 뒤섞여버린다. 내 동생의 죽음까지도.
주위가 수묵화의 먹물같이 검게 변해가면서 하늘과 바다 위의 별빛이 한결 명료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순간 나는 따라놓은 컵 속의 소주 위에 내려앉은 별을 보았다. 잔을 집어들자 술 잔 위의 별들이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작은 별에서 문득 호르르 날고 있는 배꽃이파리를 보았다. 분명 배꽃이었다. 푸른 빛 도는 창백한 배꽃이파리들이 흰나비들 같이 하르르, 하르르 바람에 날리면서 내 컵 안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2001 <소설시대>)
출처 : 소설가 유금호의 문학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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