步月
최소월
나를 생각하는 나의 님
這(저)구름 나를 생각
차츰차츰 건일며(거닐며)
這(저)달에 나를 빗최려(비추려)
徽笑(휘소:아름다운 미소)로 울어러봄에(우러러보며)
검음으로 애를 태우고
누름으로 나를 울니라.(울리니라)
빽빽한 運命(운명)의 줄에
에워싸인 나를 우는 나의 님
따듯한(따뜻한) 품속에 나를 갖추려(감추려)
그 깁흔(깊은) 솔밧(솔밭)으로 오르리라
소월 최승구 시인은 1900년대 최남선과 1920년대 주요한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문단의 주역이었다. 26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 최승구. 그의 묘에는 사랑했던 여인 나혜석(근대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 세운 사랑의 증표가 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를 따라
항일저항시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최승구 시인과 나혜석 화백의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발자취가 있다.
최소월(1892-1917 본명:崔承九))
최승구(崔承九).
1892∼1917. 시인.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소월(素月). 경기도 시흥(始興)출생.
아버지는 대현(大鉉)이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거쳐 1910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예과과정을 수료하였다. 처음에는 사학(史學)을 전공하려고 하였으나, 학비난에다 폐결핵까지 겹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당시 전라남도 고흥군수로 있던 둘째형 승칠(承七)의 집에서 요양하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사하였다.
재기발랄하고 다정다감한 그의 시재(詩才)는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 시작 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직접 극본을 써서 연출, 연기를 맡아 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단활동은 일본유학 당시 《학지광 學之光》의 편집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치하의 울분과 저항정신을 고취한 시 〈벨지엄의 용사〉를 1915년 《학지광》 제4호에 발표하는 한편, 〈정감적 생활(情感的生活)의 요구〉·〈남조선의 신부(新婦)〉 등의 수필과 평문류(評文類)를 역시 《학지광》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시작품으로는 유고시집(遺稿詩集)노트에 실려 있는 시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벨지엄의 용사〉 이밖에 〈종 鐘〉·〈사랑의 보금자리〉·〈박사 왕인(博士王仁)의 무덤〉· 〈나의 고리(故里)〉·〈불여귀 不如歸〉 등 25편을 남기고 있다.
이들 시편들은 대체로 그 이전의 개화기 시가들에서 보이는 집단적이고 민중적인 발상법과는 달리, 주정적(主情的)이고 개아(個我)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보월 步月〉과 〈조(潮)에 접(蝶)〉을 비롯한 일련의 시작들에 나타난 서정성,
즉 감상(感傷)과 향수를 기조로 한 낭만적 속성은 당시 ‘민족주의’를 표방하였거나 아니면
그것을 주제로 하여 직설적이고 웅변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는 개화기 시가보다는
한층 진전된 단계의 것으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최승구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 등 일련의 시작에 이르는 한국 근대시사에서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시적 전환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서, 그가 담당한 과도기의 교량적 구실은 우리의 근대시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저로는 1982년에 간행된 《최소월작품집 崔素月作品集》이 있다.
여류화가 라혜석과의 애달픈 첫 사랑
부유한 개명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수원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
서울진명여고보를 거쳐 동경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다녔으며 오빠 나홍석, 나경석과 함께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로 26세에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개인전(1921년)을 열어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보인다.
나경석은 이러한 나혜석에게 천재적인 문학소질을 가진 최승구가 잘 어울리겠다고 짐작해 ‘생활과 예술을 함께 할 수 있는 배필’로 여겼다.
스웨덴의 여성사상가 엘렌 케이가 규정했던 ‘연애의 이상’에 꼭 들어맞는 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최승구와 나혜석은 동경 유학생 사회에서 최고의 커플이 되어 화제를 뿌린다.
그러나 최승구는 유부남이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봉건적 가족제도와 유교적 결혼관 때문에 이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이혼풍속은 본처는 고향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고, 남자는 마음에 드는 여성과 함께 따로 살림을 꾸리는 이중결혼의 양식을 취했다.
최승구의 숙부는 차라리 첩으로 두는 한이 있더라도 이혼은 안 된다며 크게 반대했고,
나혜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최승구는 가족의 이혼 반대로 유학비 지원이 끊기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으로 끝내 깊은 병을 앓게 된다. 폐결핵이었다.
최승구는 폐결핵으로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1915년 말 그의 형이 있던 전남 고흥으로 요양을 가 군수관사에 머문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나혜석과 매일 주고받던 편지도 뜸해졌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낀 최승만(최승구의 사촌동생)은 나혜석에게 한번 다녀가라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학기 중이던 나혜석은 어렵게 최승구를 찾아가 종일 그를 보살피다
학업 때문에 그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날 최승구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일본으로 돌아온 나혜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이없게도 최승구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최승구가 떠나고 1년 뒤 수필 <회생한 소녀에게>를 발표해 그의 죽음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며, 그의 곁에 조금 더 머물렀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회환을 털어놓았다.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은 나혜석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녀를 비련의 여인으로 몰아넣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나경석의 소개로 김우영과 약혼을 한다.
김우영은 교토대 법학부를 나와 일본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신여학교 3·1운동사건 주동자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의 재판에서 변호를 맡았으며, 황옥경부 폭탄사건 때 폭탄가방을 숨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 반민족행위특별조사 위원회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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