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 소록도편
도이 김재권
저녁 무렵에 도착한 전남 고흥군 녹동, 소록도가 바로 바라보이는 녹동항(鹿洞港)이다. 한문으로 풀이해 보니 이곳 지형이 사슴의 모양인 듯. 근처에 있는 쌍충사를 우선 참배했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순직한 두 충신의 영정을 모신 곳이라는데 바다가 잘 바라다보이는 데 있어 누가 보아도 명당자리에 잘 모신 듯싶다. 다음날 새벽 5시 반에 포구로 나와 소록도를 바라본다. 소록도의 애잔한 불빛, 그 불빛 너머에는 다 그만그만한 사연들을 안고 살아가는 아픔이 배어 있을 터. 캄캄했던 하늘에 주홍빛이 감돌고 밤새 소록도를 지키고 있었을 가로등 몇 개가 빛을 잃어가고는 새벽을 열고 있었다. 저기 바다 위 감추어진 구름 아래 한 마리 작은 사슴이 가슴 저리게 내게로 다가온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외로운 아기 사슴의 섬 '소록도(小鹿島)'. 고흥반도 끝 자락 녹동항과 600m 사이에 바다를 둔 소록도는 1지구와 2지구로 구분해서 부른다 했다. 1지구는 병원직원들 거주지역(일반방문객 출입가능지역)이고 2지구는 환자들 거주지역이란다.
난대성 상록활엽수가 주종을 이룬다고 했던가. 상록수림으로 울창한 한여름 낮의 소록도 풍경은 참으로 평화롭다. 섬 전체가 아주 잘 가꾸어진 공원처럼 자연과 벗하고 있어 평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스팔트 길옆에는 백사청송(白砂靑松)이라는 말 그대로 고운 모래사장과 작은 갯벌의 정경과 더불어 해송의 숲길에는 예쁜 우체국이 있어 여행자의 마음을 상큼하게 해준다. 아, 아, 싱그러운 이 바다 냄새! 끊임없이 뭍에 오르려는 저 바닷게의 본능은 차마 눈물겹다. 그런데 여기저기 띄엄띄엄 있는 집들의 생김생김을 내가 어디에서 봤더라. 어쩌면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을 집들, 그것도 아주 작은 집들, 섬 안을 감싸는 왠지 모를 그리움의 흔적들, 그리고, 그리고 또 느껴지는 고독과 체념과 탈출... 아, 아, 나는 왜 여기서 느닷없이 '빠삐용'과 '드가'가 생각났을까?
소록도 중앙공원을 둘러보았다. 일제강점기 때 환자들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공원. 각종 열대수종과 수려한 조경이 왠지 돌아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음은 한 시대 격리되었을 그들의 진한 아픔이 배어 있기 때문일까? 공원 한가운데에 너무나도 신선한 시비(詩碑) 하나 있으니, 한때 한센병 환자였던 시인 한하운(韓河雲) 선생의 시비가 거기 그렇게 누워 목마른 여행자를 맞이했다. 방랑의 고독과 절규, 삶의 고통과 슬픔, 외로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몸부림쳤던 시인의 혼이 시비 <보리피리>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시인은 이곳 국립 소록도병원에 입원한 적은 없고 그저 치료약을 구하고자 몇 차례 다녀간 기록만이 남아있다고 전한다. 그 시대 한센병의 고통으로 어두운 세월을 보냈을 사람이 어찌 한하운 시인 한 사람뿐이었을까 마는, 피-ㄹ 닐니리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눈물의 언덕을 지나가는 시인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와 가슴이 싸하다.
중앙공원에서 선착장으로 걸어 나오는 길에 소록도가 집일 것 같은 여인의 차를 타게 되었다.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을 스쳐가는 듯하더니 이내 세우고는 "타세요!" 한다. '아, 예, 고맙습니다.' 잠시 침묵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말을 건넸다. '여기 소록도에는 몇 명이나 생활하고 있습니까?' "예, 저는 위에 2지구에 사는데요. 대략 850명에서 900명가량, 수시로 입, 퇴원하기 때문에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엔 한, 팔백칠팔십여 명 정도 될 거에요." '아, 그렇군요.' '덕분에 편안히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예, 안녕히 가세요. 좋은 여행 되세요." 소록도 어딘가에 여인의 아픔도 묻어 있을 것만 같다. "아, 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요." 그 간절한 그리움이 심연(深淵)에 짙게 배어 있을 것만 같아 배를 기다리는 소록도 여인의 뒷모습이 너무나 애잔하다. 여인에게, 보리피리에, 소록도에 그리움을 남긴다.
* <도이 혼자 떠나는 남도기행 제4차 기행>으로 2000년 8월 전남 영암, 진도,
고흥, 소록도, 벌교, 보성을 다녔다.
-동인지「상황문학」제6집 2008년 11월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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