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우야담> 유몽인 지음. 신익철 이형대 조융희 노영미 옮김. 돌베개 펴냄. 6만원 |
| |
|
|
황희 정승의 아들 황수신에겐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하게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수신이 밖에서 돌아오니 황 정승이 관복을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다. 아들이 놀라 엎드리며 까닭을 물었다. 황 정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아들로 대접했는데 도대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뉘우친 아들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했다. 김유신 등 ‘기생 끊기 고사’가 대개 그렇듯, 수신 또한 술 취한 자신을 기방으로 싣고 간 말의 목을 베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이야기는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 유몽인(1559∼1623)이 엮은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야담’이란 저잣거리 이야기란 뜻이니, 엄숙한 선비가 책제목으로 삼을만한 말은 아니다. ‘어우’란 유몽인의 호 ‘어우당’을 줄인 것으로, 본디 <장자>에 나온다. ‘어슬렁거리다’ 또는 ‘쓸 데 없는 일을 하다’란 뜻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책제목부터 근엄한 조선시대에 대한 일종의 도발이었다.
이 책에 실린 558편의 이야기에는 장르가 ‘음담패설’로 분류될 만한 것도 있고, 오늘날까지 유머집에 단골로 오르내리는 것들도 있다. 가령 어떤 선비가 벗들 앞에서 일자무식인 아내가 글을 아는 것처럼 자랑하기 위해 <공총자>란 책을 가져오도록 하자 아내가 더욱 유식하게 보이려고 “전공(앞구멍)입니까? 아니면 후공(뒷구멍)입니까?”라고 물었다는 얘기 따위가 전자에 속할 것이다. 또 한 장군이 자기 병졸 가운데 공처가가 얼마나 많은지 보려고 “아내가 무서운 자는 붉은 기 아래, 그렇지 않은 자는 푸른 기 아래 서라”고 하자, 10만 대군 가운데 단 한 사내가 푸른 기를 지켰는데, 그 까닭이 “마누라가 사람 많은 곳엔 가지 말라 했기 때문”이란 얘기는 후자에 속한다.
이런 몇 대목을 들춰 <어우야담>이 시시한 농담의 집대성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이런 대목들은 오히려 이 책이 얼마나 관용적인 기록인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유몽인은 민간의 우스개는 물론 효자 충신 열녀 지사 승려 도사 등 다양한 인물의 사람됨과 일화, 명사들의 문학 논쟁과 토론, 꿈 예언 재앙 등 괴이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폭넓게 모으고 기록함으로써 당대의 삶과 정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했다.
가령 부모가 죽은 뒤 유교 법도에 따라 삼년상 치르느라 영양실조로 죽어나간 수많은 인재 이야기를 정리한 뒤, 그는 “우리 집안엔 효자가 필요없다”고 한 중종 때 정광필의 말을 기록했다. 충효가 지고의 가치이던 시절에 어버이가 오죽하면 이런 말을 남겼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또 정몽주가 진정으로 충절을 지켰는지, 이태백이 진정 호수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죽었는지를 논하는 대목 등에서도 그의 비판적 이성은 돋보인다.
이 때문에 유몽인의 이 작품은, 불합리한 이야기를 삭제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못마땅하게 여겨 옛이야기를 그대로 수록함으로써 우리 고대사를 풍부하게 만든 일연의 <삼국유사>에 맥이 닿는다. 또 위진남북조 시대 문인들의 삶과 사색을 생생하게 담아낸 중국 유의경(403~444)의 <세설신어>를 연상시킨다.
옮긴이들은 서로 다른 판본 27종을 견주어 <어우야담>의 원문에 표점과 교감 내용을 덧붙여 별책으로 묶었고, 본문 속에 나오는 동아시아 인물들에 대한 꼬마 사전도 덧붙였다. 독자들은 비로소 우리 고전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번역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번역문 가운데 수장(水漿), 상식(上食), 임모(臨摹) 등 이미 죽은 옛말들을 풀이말도 없이 그대로 드러낸 건 아쉽다. 민간에 발을 깊게 담근 유몽인의 민중지향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 중국을 ‘상국(上國)’이라 쓴다거나 ‘우리나라 말’을 ‘방언(方言)’이라고 옛말 그대로 옮긴 건, 연구자가 현대 한국인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어우야담’완역본 ·‘한국 야담연구’ 출간 |
입력: 2006년 12월 25일 18:16:17 |
|
|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첨’ 중 ‘신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한 장군이 십만 병사들에게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는 붉은 깃발 아래,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푸른 깃발 아래 서라”고 명령했다. 모든 병사가 붉은 깃발 아래 모였는데 오직 한 병사만 푸른 깃발 아래 섰다. 그는 “제 처가 항상 저에게 ‘남자들 셋이 모이면 반드시 여색(女色)을 논하니, 남자 셋이 모인 곳에 일절 가지 말라’고 했다”며 “하물며 지금 십만의 남자가 모여 있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어우야담’에 실린 내용으로 엄처시하에서 주관없이 살아가는 한 사내의 얘기다.
조선 후기에 형성된 야담(野談)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된, 비교적 짧은 길이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가리킨다. 정사(正史)에 대응되는 외사(外史)로, 민간에 떠돌던 궁중 비화나 정치 뒷이야기에서부터, 넓게는 구전되던 여러 이야기들을 아우른다. 야담에는 우리 선인들이 만났거나 상상해낸 온갖 인간상들이 망라돼있다. 이때문에 야담집은 우리 민족의 인간상과 생활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민담등 구전이야기 망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담은 그동안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단순히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깃거리로 여겨지거나 ‘소설의 전 단계’ ‘한문학의 한 작품’으로 인식됐다.
이처럼 평가절하되어온 야담의 가치와 본질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저작 2권이 최근 나란히 출간됐다. 돌베개에서 나온 ‘어우야담(於于野談)’ 정본 완역과 ‘한국 야담 연구’.
‘어우야담’(1622)은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이 남긴 한국 최초의 야담집. 기존의 사대부적 일화나 소화(笑話)를 잡다하게 모아놓은 잡록류(雜錄類)와 달리 민간에 구전되던, 민중적 생활과 미의식을 반영한 이야기를 적극 수용해 야담 문학의 시원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어우야담’에는 인물의 일화 및 사건담, 시화(詩話), 고증·잡록류의 기록들, 귀신·신선담 등 다양한 성격의 이야기들이 섞여있다.
이번에 나온 ‘어우야담’ 완역판은 신익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등이 현전하는 ‘어우야담’ 텍스트들에 대한 정밀한 비교 작업을 통해 원문을 확정하고 번역 작업을 한 것이다. ‘어우야담’은 유몽인이 인조반정 때 무고로 인해 처형당하면서 오랜 기간 분산 전승됐다. 현재 널리 통용되는 것은 유몽인의 후손인 유제한씨가 1964년 간행한 ‘만종재본’. 전남 고흥 만종재에 세전(世傳)되던 필사본을 중심으로 ‘어우야담’을 최초로 정리한 것이다. 신교수팀은 ‘만종재본’을 26종의 이본들과 대비해 원문을 복원했다. 특히 만종재본에 누락된 39가지 이야기를 새로 추가했다. 책은 판본 대조를 통해 완성된 ‘어우야담’의 원문과 ‘이본대비표’를 수록한 원문편과 번역편 두 권으로 나왔다.
이강옥 영남대 교수(국어교육)가 쓴 ‘한국야담연구’는 야담의 본질과 서술 미학, 그리고 역사적 전개를 고찰한 연구서다. 25년 넘게 야담을 연구하고, 그 가치를 알려온 저자가 그동안 일궈온 야담에 대한 성찰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야담집에는 전설이나 민담, 일상의 특별한 사건을 다룬 일화, 한시의 창작·평가와 관련된 시화, 유가 이념을 피력한 교술 산문, 당대의 현실과 의식을 반영한 소설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이교수는 이들 중 신화·전설·민담·시화·기타 교술 산문들을 제외한 작품들을 ‘야담’으로 통칭했다.
-당대 현실 생생하게 반영-
이교수는 야담을 단일 서사 갈래로 보기보다는 복합 갈래로 보는 견해를 지지한다. 야담을 설화·일화·소설을 포괄하는 중위(中位)의 서사 문학 갈래로 보고, 이를 다시 야담계 한문소설과 야담계 일화로 나눴다.
특히 야담계 일화는 조선 후기 급격히 변해가던 현실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통해 형성된 사고유형과 행동방식을 담은 새로운 서사형식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책은 야담계 일화를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 그것이 야담계 소설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리를 밝혔다. 아울러 ‘학산한언’ ‘천예록’ ‘동야휘집’ ‘금계필담’ ‘차산필담’ 등 조선 후기 주요 야담집에서부터 한말 장지연의 ‘일사유사’ 등에 이르기까지 야담집의 역사적 변천 양상을 고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