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권에게 고향 학림리는 아픔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삶 깊숙이 관여한 채 몸을 조여오는 학림리는 그에게 기피의 대상이었다. 학림리가 그에게 던져준 것은 상처였다. 군대를 다녀온 직후 생목숨을 던져버린 동생이 그렇고, 7년 동안이나 방구들에서 병을 앓다 간 생모의 죽음 또한 딛고 일어서기 힘든 상처였다. 그러나 사람은 근본적으로 근원으로 회귀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외면하고자 하는 생각에 비례하여 다시 고향으로 쏠리는 마음을 송수권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한 사람이 이룩한 문학은 근원에 바탕을 두기 마련이다. 송수권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초기 시편들은 대부분 고향 학림리에 대한 기록이며 그는 학림리 안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여진 아득한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곧 젊은 나이에 이미 생의 의미를 소진해버린 송수권 자신과 동생의 죽음을 환생의 길로 인도하는 치열한 굿판이었다.
그의 시는 아주 까마득히 잊혀진 정서를 지금의 시간 앞에 다시 끌어다 앉히는 힘을 지녔다. 지금껏 송수권의 이름 앞에 지치지 않고 따라다니는 수식은 ‘토속’이다. 그는 전라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시 속에 풀어놓으며 대상에 파닥이는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 토속어들로 인해 그의 시는 농촌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하게 살아오게 만든다. 그에게 전라도 사투리는 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 시대의 표준어가 서울말이라면 판소리의 표준어는 전라도 사투리다”는 게 송수권의 말이다. 결국 표준은 쓰는 사람에 의해 정해지기 마련이며 송수권식 시어의 표준은 전라도 사투리다.
<공동 묘지의 벌겋게 까진 잔등이 비에 얼룩지고/비명처럼 황토흙의 빛깔들이 새어 나왔다/ 외짝 신발 하나를 묻고 봉분을 짓고/“오매 오매 날 무얼라고 맹글었는고 짚방석이나 맹글 일이제…”/흐렁흐렁 울음 속에서도 황토흙처럼 불거져 나온/저 전라도의 간투사들> (「묵호항」 부분)
평생을 같이 했던 사람의 죽음을 단지 슬픔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은 자신을 ‘짚방석’보다 못한 존재로 비유하는 고모의 입말을 통해 가능해진다. 현실에서 건진 전라도 말은 슬픔을 넘는 해학이며 아픔의 승화다. 한을 풀어내는 송수권의 방식은 적절한 토속어의 사용 안에 있으며 그가 부리는 언어들은 토속과 어우러질 때 긴 파장을 만든다.
쓰레기통에서 건진 시인 송수권에게 돌아보기 힘든 시절은 학림리에서 수박농사를 짓던 때이다. 교직을 그만두고 방황하던 서울에서 어린 아이를 들쳐업고 자신을 찾아 나선 아내를 만났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학림리에서 흙 파먹고 살았던 시절, 그는 동생의 죽음이 던진 충격에서 쉬 벗어나지 못했다.
동생의 자살이후 송수권에게 삶은 아무 의미없음으로 정리됐다. 몇몇 절을 기웃거리며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고, 여차 하면 생을 버릴 요량으로 수면제를 한 움큼 가지고 다녔다. 그 무렵 「문학사상」에서 당선 통고가 왔다. 서울에서 방황하던 때 그는 백지에 휘갈겨 작품을 응모했다. 그의 작품은 원고지에 쓸 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마침 편집주간이던 이어령씨가 쓰레기통에 쌓인 원고들을 보고 꺼내 읽었고, 송수권의 작품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런데 막상 주소지 서대문 ‘화성여관’으로 아무리 연락을 해도 있어야 할 작가 송수권은 종적도 없었다. 주간은 그를 1년 동안 찾아 헤맸고 학림리에서 수박 농사짓던 송수권을 찾아냈다. 주간이 그를 만나 대뜸 던진 말은 “자네는 쓰레기통에서 나온 시인이야!”였다.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그렇게 만나는 것을> (「산문에 기대어」 부분) 그의 등단작 ‘산문에 기대어'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산문에 기대어'는 죽은 남동생에 대한 제의로 씌어진 작품이다. ‘산문'은 삶과 죽음의 경계의 문이다.
학림리 산 중턱에 자리잡은 동생의 무덤은 고향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는 “고향 산허리에 누워있으니 동생은 죽어서 더 편안할 것이다”고 했다. 송수권이 담배에 불을 붙여 동생의 묘 위에 놓았다. 죽은 자에게 건네는 산 자의 예의, 그 행위는 「산문에 기대어」를 관통하고 흐른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에서처럼 한 잔은 산 자가 마시고 나머지 한 잔은 죽은 자의 몫이다. 살아 돌아와 술잔을 채워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 궁극적으로 「산문에 기대어」는 살이 썩어도 영원히 남는 터럭(눈썹)을 매개로 한 재생의 길이다.
죽창으로 살아오는 대숲 바람소리 학림리는 행정구역상 고흥군 두원면 학림리이다. 송수권은 그 땅에서 자라며 농촌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물들었다. 송수권의 전매특허와 다름없는 토속적 색채는 곧 고향 학림리의 것에 다름 아니다. 송수권과 함께 찾아간 학림리, 새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고 텅 빈 송수권의 고향집은 폐허를 연상시켰다. 넓지 않은 마당은 웃자란 억새로 가득했고 사람의 온기는 이미 없었다. 송수권의 집처럼 고향 학림리도 시름에 잠겨있었다.
<밝은 햇빛 떨어진 황토길/통나무 같은 지렁이 한 마리가 고딕체로 넘어져 있다/농사는 갈수록 힘들고/경제 대국은 어려워요/소와 마부가 깍깍 한낮의 정적을 씹어놓고 갔을/두 줄의 선명한 수레 발자국> (「環村5」 부분) 환촌은 인가가 둥글게 고리모양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의미한다. 송수권의 시에서 환촌은 곧 학림리이고, 벌어먹을 땅을 중심에 두고 마을이 형성돼 있어 나라 땅 대부분의 마을은 환촌이다. 여건 자체부터 이미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의 논리는 더욱 더 농촌을 외면한다. 송수권의 인식 속에서 학림리는 막막한 땅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한이다. 그러나 송수권은 한을 그 자체로 묶어두지 않는다. 한과 맞서 싸워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낸다. 그의 대숲소리는 그래서 옹골차다.
학림리에는 대숲이 많다. 송수권의 시에 대의 이미지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소리는 단순하지 않다.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타는 내음…> (「대숲 바람소리」 부분)
학림리의 대숲소리는 송수권의 시를 통해 죽창으로 되살아온다. 대는 난세에는 죽창으로, 평온한 시절에는 피리로 태어났다. 대나무가 담고 있는 이 양극단의 이미지는 헐벗은 땅을 안으로 보듬어내려는 송수권의 의지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는 “황토, 뻘과 더불어 대나무는 우리 국토의 3대 정신이다”고 했다. 그의 시는 곧 국토의 정신과 그 속에 살아내는 사람들을 오롯이 담아내고자 하는 당위성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송수권은 고향 학림리를 돌아나오며 “고향의 흙냄새는 잃었지만 저 대숲마을의 풍경은 무덤 속까지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무덤에까지 가져가려 하는 것은 단순한 고향 풍경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발 딛고 살아낸 사람의 시간과 정신일 것이다. 정상철 기자 dreams@jeonlado.com
송수권은 주변 사람들에게 ‘5분 후에 웃는 사람’으로 통한다. 모든 게 느린 그의 성격 때문이다. 그는 ‘느림의 미학’을 인생의 길로 삼는다. 아무리 원고를 쓰는 일이 버거워도 그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며 자동차 운전을 배우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곡선 속에 있다. 희망도 꿈도 사랑도 아픔도 모두 곡선으로 모아진다. 직선 안에는 시간조차 없다. 단지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다”는 게 송수권의 말이다. 열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는 동안 그는 대나무, 황토, 뻘로 이어지는 국토의 정신을 가다듬는 데 천착했다. 그 안에서 그는 “현세의 질서가 아닌 우주의 정신”을 만났다. 고흥군 두원면 학림리에서 태어난 그는 지난 75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로 신인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첫시집 『산문에 기대어』를 시작으로 최근에 나온 『파천무』까지 열 권의 시집을 묶어냈으며 김달진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