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는 전남 고흥에서 부친 천성욱과 모친 박운아의 1남 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옥자(玉子)였다. ('경자'라는 이름은 천경자가 센티멘털하던 소녀 취미로 스스로 지어 붙인 이름이라 한다)그녀는 여동생 옥희와 남동생 규식과 고흥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수려한 풍경을 가진 고장은 그녀의 유년기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는데 한몫하였다. 그녀는 고흥에서 유치원과 고흥보통학교를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유년기의 천경자는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천경자의 문학적 소양을 길러 주고 소질을 게발해 주는 사부(篩父)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천경자의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나, 당시로는 보기 드문 재원으로 외할아버지 못지않은 소양과 기질을 딸에게 대물림해 주었으며, 천경자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묵화를 치거나 친구들과 모여 수를 놓다가 때로는 단가를 부르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또한 그녀는 보통학교 시절 교정에서 열린 박람회장에서 소록도 나병원 간호부로 있던 선배 길례 언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길례언니는 천경자의 연작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이 되었다.
광주공립여자보통학교로 진학해서는, 답답한 기숙사를 빠져나가 시내 이발관에서 단발을 하고 돌아와 교내를 떠들썩하게 하여 퇴학 문제까지 논의되었다가 가까스로 면했던 일도 있었다. 그 무렵 천경자는 영화 잡지를 많이 사 보았는데, 여배우의 커리커처를 잡지에 그려보내면 다음 호에 실려 나오기도 했다.
여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천경자는 동경 유학을 결심하였고, 이듬해인 1940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지금의 동경여자미술대학)에 진학하였다. 동경에서 그녀는 당시 인물화의 대가라고 이름나있던 이토 신스이의 문화생이 되고 싶어하였으나, 실패하고 대신 고바야가와 기요시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노점>이라는 그림을 처음으로 출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이듬해 반신불수 외조부를 모델로 한 <조부>가 22회 선전에 입선하게 되었다. 뒤이어 1943년, 외할머니를 모델로 한 졸업 작품 <노부>가 마지막 선전에 입선하고, 고바야가와 선생이 소속한 인물화 단체 청금회전에 입선하였다.
유학 시절, 첫 남편 '이철식'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지만(1944) 결혼은 얼마 못가 파경에 이르게 된다. 이후 이철식과는 6.25 전란으로 인해 인연마저 끊어지게 된다. 이 시기의 일은 전남여고 강당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에 처음 만났던 지방 신문기자 김씨(천경자는 그 남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음) 와의 인연, 그리고 여동생 옥희의 이른 죽음(1951년 28세의 나이)과 더불어 첫 결혼의 실패는 천경자의 삶과 작품세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천경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명으로서 우뚝하다. 채색화를 왜색풍이라 하여 무조건 경시하던 해방 이후 60년대까지의 그 길고 험난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채색화 붐이 일고 있는 오늘을 예비했던 그 확신에 찬 작가정신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존재는 더욱 확고하다.
작품세계
천경자는 1998년 자신이 제작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기증된 작품들 중, 32점은 서울시립미술관의 상설전시 <천경자의 혼>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상설전시 <천경자의 혼>에서는 테마에 따른 다섯 개의 섹션으로 전시를 구성하여 천경자 특유의 자전적 채색화를 비롯하여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자화상과 해외 스케치 여행 중에 만난 이국(異國)여인의 모습을 담은 인물화, 지구를 몇 바퀴 돈 세계 여행을 통해 제작한 여행풍물화 및 문학 기행화, 학창 시절의 습작 등 다양한 유형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천경자의 그림은 그 자신의 생활감정을 포함하여 자연의 아름다움, 생명의 신비, 인간의 내면세계, 문학적인 사유의 세계 등 폭넓은 영역을 포괄한다. 그녀의 작품세계에서 중심적인 이미지로 떠오르는 꽃과 여인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통한다. 일상적인 감정을 그림 속에 그대로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체험적인 인식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꽃, 동물 등의 소재를 비롯하여 독특한 색채나 구성 등은 훗날 '천경자 화풍'이라고 일컫는 작품경향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그림에서 꽃과 여인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상징성을 내포한다. 일상적인 생활감정 뿐만 아니라, 속내를 은유적이고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천경자의 작품은 '자전적'이라는 평과 함께 천경자만의 독자적인 화풍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자전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작품 속에 담겨있는 모티프나 전개가 작가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의미하는데, 거의 모든 작품에서 천경자는 자신의 삶과 꿈, 환상, 동경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작품에 드러나는 특유의 문학적 감수성과 서정성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 기인한 (자전적)감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천경자 자신은 이러한 감성을 한마디로 '한(恨)'이라 표현한다. 이러한 자전적 성격은 1950∼70년대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많이 드러나는데, 특히 '천경자'라는 작가의 존재를 화단에 강하게 각인시켜 준 <생태>를 비롯하여 <여인들>, <바다의 찬가>, <백야>, <자살의 미> 등 6점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2]
천경자의 작품에는 인물화가 많은데 특히 여성으로 일관되는 여성시리즈 인물화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일종의 '자화상(自畵像)성격의 인물화'이고 또 하나는 일상생활이나 여행을 통해 만난 '실재 인물들을 대상으로 그린 인물화'이다. 천경자의 인물화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단순히 작품 소재만이 아닌 바로 작가 자신의 투영된 모습, 즉 분신(分身)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인들의 묘사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생명체'를 그려왔고, 또 이것이 천경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분신으로 탄생되는 수단이 되어 인물화는 그의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천경자의 작품에는 다른 작가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작품세계가 있는데 바로 여행을 통해 제작한 '풍물화'들이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30여 년 간 다녔던 해외여행을 통해 제작된 것으로 이국에서 접했던 이색적인 자연과 풍물들을 스케치를 통해 꼼꼼히 기록한 후 여행에서 돌아와서 오랜 제작시간을 거쳐 여행의 감흥과 회상을 되살리면서 거의 완벽에 가깝게 치밀하고도 독특한 채색작업을 통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편집] 저서
《여인 素描》
《유성이 가는 곳》
《언덕 위의 洋屋》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恨》
《자서전 내 슬픔 전설의 49페이지》
《자유로운 여자》
《쫑쫑》
《꽃과 색채와 바람》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탱고가 흐르는 황혼》
《천경자 화집》
'고흥출신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편제 소리의 대가 송순섭 명창 (0) | 2010.04.16 |
---|---|
산소탱크 박지성의 축구세계 (0) | 2010.04.16 |
황학주 시인과의 일문일답 (0) | 2010.04.16 |
유금호의 삶과 작품세계 (0) | 2010.04.16 |
송수권 시의 근원 고흥군 두원면 학림을 찾아서 (0) | 2010.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