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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문학

유금호의 현대수필"30년의 세월, 그 10월 19일"

by 고흥을 찾아서 2011. 10. 25.

 

30년의 세월, 그 10월 19일

- 유금호

 

<......늦게까지 장가를 가지 않고 있어 주변 분들께 그 동안 걱정을 끼쳐 드렸는데 저, 장가가기로 했습니다....신부는 더러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만 같은 길을 걷는 김정수라고..... 결혼식은 어려서 제가 자랐던 해풍 부는 시골 바닷가에서 간단하게 갖기로 했습니다. 제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하셨던 손장윤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드렸습니다.......>

 

청첩장 서식 같은 건 싹 무시하고, 둘 다 직장이 있던 서울의 예식장도 아니고, 시골 바닷가에서,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 주례로 장가를 들겠노라고 복사된 친필 편지 몇 장을 지인들에게 보낸 것이 30년이 되었다.

 

74년 10월 19일. 이 친필 편지는 시골 양가에도 물론 통고되었다. 지금이야 아내가 좀 알려진 방송작가가 되었고, 나도 학교에서 월급 나오고, 가끔 많지는 않지만 원고료라는 것이나와서 소주 값도 되지만 30년 전 우리 결혼 무렵엔 주변이 거의 비슷하게 다 가난했었지 싶다.

 

나도 가난했고, 아내도 가난했고, 집안도, 사회도 다 가난했다. 그래서 같이 살 집이나 방, 그 흔한 장식장, 무슨 세간 살이 따위도 없었고, 그런 것을 준비할 여력이나 계획도 없었다.

 

나는 하숙하던 집 아주머니에게 내 방에 사람이 하나 더 들어와도 괜찮다는 허락을 얻어, 숟가락과 젓가락 두 개, 밥공기와 냄비 두 개를 시장 통에 가서 사 왔던 것이다.

 

우리의 신혼은 내 하숙방에서 아침밥만 끓여 먹으며 그렇게 시작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서른세살 노총각은 소설을 씁네, 학문을 해야겠네, 비현실적인 꿈속에서 살았고, 아내 역시 풋내기 신문 기자로 현실적 생활 감각이란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둘 다 그 시절, 한번도 가난이 슬프거나 비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주일 두어 번은 좁은 하숙방에 내 술친구들을 불러 소주에다 마른 멸치와 고추장으로 술 파티를 열곤 했는데, 아내 역시 끼워 들어 즐겁게 떠들어대곤 했으니까 말하자면 둘 다 소갈머리가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다.

 

결혼에는 운명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겠지만 우리 결혼 역시 조금은 숙명이었다는 회상을 한다.

 

우리가 결혼을 결정했을 때는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얼마 후였고, 아내 역시 몇 년간 병석의 아버지를 여읜 후였다.

 

거의 같은 시기 두 분이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다면 우린 결혼까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하곤 한다.

 

장가 갈 기미가 보이지 않던 아들에게 가까운 여자를 보여 주어야 눈을 감겠다던 어머니의 유언 가까운 애소에 부탁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그녀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았고, 어머니가 편하게 떠나실 수 있도록 해보자고 했던 그 연극의 날, 그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우린 두 분을 보내고 나서 일종의 숙명으로 우리들 결혼을 결정했었다.

 

그러나 나는 4남매 가난한 농촌 출신의 장남이었고, 아내 역시 6남매의 장녀. 부모 한쪽씩을 잃고 큰형에게, 큰누나에게 용돈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바라보고 있는 동생들 속에서 양쪽 집안 다 우리 결혼에 작은 세간 하나도 보태어 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집을 옮기면서 낡은 장농을 버린 적이 있었다. 첫 아이가 생긴 훨씬 뒤, 내 소설 원고료가 생각보다 조금 많이 생겨 우리가 최초로 장만했던 상표도 없는 싸구려였는데, 그걸 버리면서 아내의 눈시울이 젖어가던 것을 기억한다.

 

모유가 부족해 분유를 먹던 첫 아이의 분유가 떨어졌던 일요일, 내 생애 최초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몹시 슬프고 쓸쓸한 체험이었다. 우린 신혼시절 호주머니가 늘 가벼웠지만 시장 통 싸구려 순대 집이나, 포장마차에서 같이 빗소리를 들으며, 혹은 일요일이면 친구들을 불러 서울 근교 산마루턱에서 내 스타일의 엉터리 요리 솜씨를 뽐내며, 사르트르를, 장.주네를, 홍명희와 이태준을, 때로는 달리에 대해서, 샤갈에 대해서, 고갱과 고흐에 대해서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래서 늘 부자였다. 부부가 비슷한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재산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우리는 지금도 가끔 한다.

 

서로의 일을 간섭하는 것은 피하지만 부부가 때때로 동료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풍요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방송 작가가 된 후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농담 삼아 했던 말이 기사로 실린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술이 엉망으로 취해서 쓰러져 잠든 내 모습을 보고, 한 순간 남편이 죽어 버릴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서 아이 둘을 돌아보았다는 것이다.

 

남편이 없어도 아이는 길러야될 것 같아 내가 잠든 뒤 틈틈이 드라마를 써 보았던 것이 당선이 되었고, 그 이후로는 나보다는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의 길을 지금껏 걸어온다.

 

부부 각자가 자기 일을, 그러면서도 얼마간 소통되는 세계의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부부싸움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신혼 초에는 사글세 방 생활이라 주인집에 민망해서 싸우지 못했고, 작은 집이 생겼을 때는 아이들 앞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기회를 놓쳐버리다 보니 우리는 아직 제대로 부부싸움을 못하고 나이를 먹어버린 셈이 되었다.

 

그렇게 30년. 이제는 주말 부부가 되어 시간이 없어서도 부부 싸움의 기회가 영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10월 19일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