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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관련미술

목재 허행면, 잠시 꾸었던 거금도 금빛 꿈을 그림에 담다

by 고흥을 찾아서 2022. 3. 16.

<허행면 채광’, 1940년대, 지본채색, 187.0×163.3, 의재미술관>

 

채광은 목재 허행면(木齋 許行冕, 1906-1966)이  2m에 가까운 큰 화면에 금광을 채굴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 그림은 고흥군 소재 금광채굴 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렸으며,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입선한 자원개발로 추정되는 작품입니다.

 

채광은 전체적으로 섬세한 선과 필치, 그리고 바탕에 호분을 칠해 온화한 채색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금광 입구의 모습과 자갈, 그리고 짐을 나르는 인부 등은 사생을 거쳐 표현됐습니다.

 

전통 남종화보다는 근대적 미감의 기법과 소재로 현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수채화와 같은 채색을 더해 부드러운 감각적 분위기를 나타내 일본 남화풍의 영향이 간취됩니다.

 

이 작품에서 나무나 풀 언덕과 구릉 등의 표현에서 고법산수에서 사용하던 준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신 입체감과 음영을 나타내고 섬세한 세필로 철저한 분위기 묘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구도의 이상적인 산수공간보다는 풍경의 일부를 클로즈업하고 주변은 과감하게 생략하는 스냅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며, 이 같은 화면 구성의 변화는 관전(官展)양식에 부합하려는 시도로 정형화된 수묵산수화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허행면이 직장이었던 전남도청을 그만두고 고흥에서 금광채굴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30년대 금광개발 열기가 식어가던 즈음 1941년이었습니다.

 

그가 고흥을 택한 이유는 예부터 몇몇 곳은 금이 많이 묻혀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으며, 거금도의 경우 금맥이 산에 있다 해서 거금도(居金島), 거억금도(居億金島)라고도 불리고, 어전리(於田里) 금장(金藏)의 경우 금이 많이 묻혀 있어 금장 또는 진장(眞藏), 석정리(石井里) 동정(桐井)의 경우 금이 매장된 마을이 있어 고라금(古羅金)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에 그는 가슴의 불을 지폈으나 금을 캐내는 일은 만만치 않아 1년 여 만에 금광채굴사업은 실패하고 그때의 그 경험을 살려 채광이라는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그는 광산채굴사업, 제지공장 등을 운영하면서 화가로서 늦게 출발하여 형인 의재 허백련이나 남농 허건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는데 品格에서는 형인 의재를 따라가지 못하나 技法만큼은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허행면은 1938년 허백련이 발족시킨 연진회를 통해 전통화법을 계승하고 허백련의 표현법을 받아들여 193918회 선전에 산수화를 출품해 처음으로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194322회 선전에 자원개발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또한번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면모를 다졌습니다.

 

자료출처 : http://kjdaily.com/article.php?aid=1647339791569508230 

 

[先人 향기품은 湖南學 산책]옛 그림 이야기 목재 허행면 ‘채광’(採鑛)

‘채광’은 목재 허행면이 고흥군 소재 금광채굴 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2m에 가까운 큰 화면에 금광을 채굴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 그림은 허행면이 1943년 제22회 조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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