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향인 고흥 고흥군민의 성품은 온유 순진하고 인정이 많으며 의협심이 강하다 고흥은 예로부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구국에 앞장섰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의 충의 의사는 물론 항일 애국지사를 비롯한 반공 애국 충훈 용사 등 수많은 충효열사를 배출한 역사의 고장으로 우리의 가슴마다 그분들의 정신이 숨쉬고 가는 곳마다 그분들의 발자취가 서려있어 충절의 고장이요 선비의 고장이다.
※ 나라지킴 고흥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 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195인의 인물과 기타 국난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분들을 조사하여 수록한다. 이분들을 충훈, 절의, 의사로 구분하였다.
* 의사(義士)
※ 나라지킴 고흥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란 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195인의 인물과 기타 국난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분들을 조사하여 수록한다. 이분들을 충훈, 절의, 의사로 구분하였다.
* 의사(義士)
성 명 |
본관 |
약 사 (略 史) |
거주지 |
강종문(姜宗文) |
진주 |
자(字)는 일성(日星)이다. 진위장군(振威將軍) 흥진(興震)의 후손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때 공을 세웠다. | |
기산도(奇山度) |
행주 |
자(字)는 자인(子仁)이다. 식재(植齋) 재(宰)의 아들로 오적(五賊) 가운데 하나인 이근택을 대궐에서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피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붇잡혀가면서도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실토하지 않았다. 고종이 승하하자 평양립(平壤笠)을 쓰고 생을 마쳤다. | 도화 |
김원봉(金元鳳) |
김녕 |
자(字)는 상지(祥之)이다. 정헌(正憲) 응국(應國)의 아우로, 임진왜란때 정신(挺身)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갔다. 정유재란때에는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다. | |
김진희(金晉熙) |
김해 |
자(字)는 숙겸(淑謙)이다. 갑봉(甲峰) 우항(宇抗)의 후손으로 영조(英祖) 무신변(戊申變)에 참전하여 적을 토벌하였다. | |
김사빈(金士彬) |
김녕 |
자(字)는 재용(在瑢)이다. 부사 언공(彦恭)의 후손으로 광주학생운동의 대역군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불복하였다. | 과역 분천 |
김삼석(金三錫) |
〃 |
자(字)는 기정(基正)이다. 월파(月波) 추형(秋炯)의 아들로 광주학생운동때 선전원으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저항하다가 투옥되었다. | |
도치웅(都致雄) |
성주 |
자(字)는 희중(希中)이다. 판관(判官) 맹삼의 후손으로 영조 무신변에 송팔응을 따라 적을 토벌하였다. 이 공으로 판관에 제수되었다. | |
목홍석(睦洪錫) |
사천 |
자(字)는 치숙(致淑)이다. 인범(仁範)의 아들로 기미년(1919) 3·1운동에 가담하여 7년 옥고를 치렀다. | |
박지인(朴之仁) |
밀양 |
部將 응사의 아들로 을축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 부장으로 강도(江都)에 들어가 사절신(四節臣)이 순절한 것을 보고 국가의 치욕을 슬퍼하며 자결하였다. | |
박정영(朴挺榮) |
진원 |
진원군(珍原君) 희중(熙中)의 9세손으로 장원서별제(掌院署別提)로 재임중 도적 준(儁)의 천권(擅權)과 서적(西賊) 창광(猖狂)을 막았다. 사천현감(泗川縣監)으로 재임중 많은 치적을 남겼다. 후손으로 현주(炫柱)가 있다. | 고흥 간천 |
박중송(朴重松) |
〃 |
호(號)는 상체(常*)이다. 철현(喆炫)의 아들로 갑오 동학농민전쟁때 조정의 부름을 받아 농민군과 싸워 왕조에 공을 세웠다. 후손으로 충주가 있다. | |
박명현(朴名鉉) |
밀양 |
호(號)는 청계(淸溪)이다. 승환(承煥)의 손자로 을사조약후 면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항거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가혹한 형을 받았으나 끝까지 불복하였다. | |
송주흥(宋柱興) |
여산 |
자(字)는 사형(士衡)이다. 간의 후손으로 순종대 무기(戊己)의 난에 안규홍의 막하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 |
송계춘(宋啓春) |
〃 |
자(字)는 화원(華源)이다. 무징(茂徵)의 후손으로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하였다. 난의 진압후에 분무훈(奮武勳)에 책록되었다. | |
송주석(宋柱石) |
〃 |
자(字)는 경문(敬文)이며 호(號)는 묵헌(默軒)이다. 계옥(繼玉)의 증손으로 임·신(壬·申)의 변에 의장으로 발탁되고 청마동비(靑馬東匪)에 소모사(召募使)로 성을 지키며 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 |
송계명(宋桂明) |
〃 |
자(字)는 계안(啓安)이며 호(號)는 가월(柯月)이다. 명규의 후손으로 무신의 변에 김성택(金晟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국치(國恥)를 씻으려다가 일본군에 붙잡혔으나 굴하지 않고 순국하였다. | |
송남섭(宋南燮) |
〃 |
자(字)는 화숙(華淑)이며 호(號)는 만오(晩悟)이다. 오서(五瑞)의 후손으로 을사조약(乙巳條約)체결후 의병을 일으켜 김성택과 함께 박곡, 팔영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적을 많이 베어 죽였다. | |
신덕성(申德暉) |
고령 |
호(號)는 수암(水巖)이다. 여량의 아들로 갑진년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으로 예교(曳橋)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훈련원봉사에 제수되었다. | |
신덕연(申德淵) |
〃 |
자(字)는 군미(君美)이며 호(號)는 율헌(栗軒)이다. 여량의 아들로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그의 공은 공훈록에 기록되었다. | |
신명휴(申明休) |
〃 |
자(字)는 성숙(聖淑)이다. 여식(汝拭)의 후손으로 무신년(1908)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었다. 일본에 의해 징역 15년을 언도 받았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 |
신천휴(申千休) |
고령 |
자(字)는 원숙(元淑)이며 호(號)는 금강(琴岡)이다. 영구(永求)의 아들로 3·1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 |
오연석(吳然錫) |
동복 |
자(字)는 석주(錫柱)이며 호(號)는 남계(南溪)이다. 중구의 아들로 3.1 운동때 목치숙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복역하였다. | |
오창선(吳昌善) |
흥양 |
3·1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뤘다. 출감후 광복군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기여하였다. 이 공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공로포장을 받았다. | |
류영휘(柳永暉) |
고흥 |
자(字)는 서일(瑞日)이며 호(號) 안곡(安谷)이다. 송암(松巖) 순(淳)의 후손으로 고종이 승하하자 백립(白笠)으로 여생을 마쳤다. | |
류공삼(柳公三) |
〃 |
충서(忠恕)의 후손으로 경술국치(庚戌國恥)후 광복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복역중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 |
류성갑(柳聖甲) |
〃 |
호(號)는 석계(石谿)이다. 화권(化權)의 아들로 안중근의사 사진과 독립선언문 은닉죄로 4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일본대학법문학부 재학시절)제헌의원 헌법기초의원 국민훈장무궁화장 추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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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채(李秉埰) |
전주 |
자(字)는 경휘(敬輝)이며 호(號)는 백남(伯南)이다. 진사(進士) 대진(大進)의 손자로 을사조약(乙巳條約)때 허위(許蔿) 민긍호(閔肯鎬) 김규식(金圭植)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철원, 마전 등에서 많은 일본군을 살해하였다. | |
장 걸(張 杰) |
인동 |
충정공(忠正公) 안세(安世)의 후손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때 공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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